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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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김포공항에서(1)

2020-11-16 (월) 노신영 (가정사역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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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김포공항이었다. 지금은 세계적인(?) 인천공항이 생겨서 초라하게 보이는 국제공항이 되었지만, 45년 전 외국으로 나가는 길은 김포공항뿐이었다. 비행기가 사라지도록 환송나온 가족들이 손을 흔들며 눈물을 흘리는 풍경이 자주 목격되던 곳이었다. 그 눈물의 이별 속에는 희망, 기대, 설렘, 그리고 오랫동안 못보거나 끝일지도 모른다는 슬픔과 갈라짐(가족, 인연의 갈라짐)의 그림자도 있었다.

그 공항 한쪽에서 나는 미국간다고 엄마가 모처럼 해주신 호랑이무늬 반코트를 입고 환송나온 일가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미국으로 유학 가 있는 대학선배(지금의 남편)가 있는 학교로 유학의 길을 떠나는 중이었다.

그런데 저기 한구석에 까만 안경테의 남자 한 분이 나를 향해 자꾸 손짓을 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몰라봤는데 두세번 돌아보니 아버지였다.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서 내가 그를 눈치채기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여덟살 때처럼 또 가기 싫은데 갔다.


아버지는 손에 작은 종이쪽지를 쥐고 있다가 내 손을 잡으며 “네 남동생 이름이다. 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기억해라” 하면서 내게 쥐어주려 하셨다. 나는 손을 탁 치면서 “나는 여동생 둘밖에 없어요. 그리고 미국 가면 엄마랑 동생들 다 미국으로 데려갈 거에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땅바닥으로 종이쪽지는 떨어졌다. 여덟살 때의 내가 아니었다. 나는 달라져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깊은 분노였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수치심이 깊은 분노로 자리잡았고 내 삶을 많이 흔들어대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아버지의 얼굴을 뒤로하고 정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한국을 떠났다.

그리곤 그 일도 아버지도 잊어버린 채 열심히 산다고 살았다. 미국으로 건너와서 아버지와는 사는 하늘도 바꾸었고(나는 늘 입버릇처럼 아버지와는 한 하늘 아래 살지 않겠다 말하곤 했다), 결혼하여 성도 바꾸었고, 아이를 둘이나 낳았는데도 나의 삶은 쉽지 않았다. 마음에는 큰 구멍이 나 있는 듯했고, 그 사이로 찬바람이 숭숭 지나다녀 나는 늘 춥고 외로웠다. 그런데 기억도 가물해진 이 사건이 내 인생의 ‘미해결(unresolved matter) 사건’으로 해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신영 (가정사역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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