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문교] 한국 의사들의 집단 이기주의
2020-11-13 (금)
제이슨 최 (수필가)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환자들의 목숨을 담보로 밥그릇이 줄어들까봐 의사의 상징인 가운을 벗어던지고, 자신들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전국 의사협회 회원들 의사면허를 모아 청와대 앞에서 불을 질러버리겠다고 의사의 품위와는 거리가 먼 점잖지 못한 언행으로 정부를 협박하던 의사협회장의 모습을 보고 의료업계를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속내를 깊이 들여다볼 수는 없었지만 평범한 시민의 눈에는 분노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의사가 면허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선서를 해야 한다. 히포크라테스는 기원전 460년경에 태어나 90세쯤에 사망한 고대 그리스의 의사로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이다. 선서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음에/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 나의 양심과 위엄으로서 의술을 베풀겠노라/ 나의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나의 환자가 알려준 모든 내정의 비밀을 지키겠노라/ 나는 의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겠노라/ 나는 동업자를 형제처럼 여기겠노라/ 나는 인류, 종교, 국적, 정당, 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나는 인간의 생명을 그 수태된 때로부터 지상의 것으로 존중히 여기겠노라/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이상의 서약을 나의 자유의사로 나의 명예를 받들어 하노라] 이 서약은 황제나 오늘날 대통령이 제정하여 강제로 시킨 것이 아니다. 1948년 세계의사협회(22차)가 제네바에 모여 만들고 스스로 시행한 선언문이다. 미국의 병원에서는 생명이 위태로운 응급 환자가 병원을 찾아오면 무조건 입원시키고 치료 먼저 시작하지만, 한국의 병원에서는 환자가 죽어가고 있는데 입원 보증금을 먼저 내라고 요구하다 시간을 놓쳐서 귀중한 목숨을 잃는 일도 많았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정신이란 그 어떤 시술이나 의료 행위도 단순히 의사들의 밥벌이를 위해서 행해지는 것은 안 되며, 오직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시대라 하더라도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의사들의 기본 윤리인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의사들의 반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묻고 싶다. 같은 대학을 나와서 대기업에 들어가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 직장인들과 수련의 과정을 마친 의사들의 같은 7년 후 연평균 수입은 대기업 사원보다 5.5배가 높다고 통계에 나와 있다. 모든 의사가 직장에 다니는 회사원들에 비해 월등히 우월한 존재인가? 누가 그들에게 그런 지위를 부여해 주었는가? 형편이 어려운 농어촌지역에 의사들이 부족해서 그들을 위한 조건부 의대 정원을 늘리자는 정책에 목숨을 걸고 대들어야 하는가 말이다. OECD 국가들의 의사 평균은 1,000명당 임상의사 3.5명이고, 한국은 2.3명이다. 한마디로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일부 선진국에 비해 의료수가가 낮기 때문에 수입을 기준으로 보면 상대적으로 더 많은 환자를 봐야 한다 점은 인정한다. 그것이 합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의사들의 집단행동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의약분업 투쟁에서 보여준 의사들의 모습에도 국민들은 눈을 흘기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의약분업의 시초는 이미 1240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 때부터다. 의사가 진료와 조제를 독점할 경우 고의 또는 실수로 잘못된 투약을 할 경우 의사의 잘못된 처방을 약사가 바로잡기 위해 법으로 제정하고 시행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한국에서는 2000년에야 이법의 시행으로 황제나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일반 서민들이 의약분업의 혜택을 누리게 되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직도 의약품 선택권이 여전히 의사에게 있고, 약사에게는 의사 처방전의 오류를 수정시킬 권한은 있으나 의사에게 알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수정을 꺼리는 게 일반적 현실이고, 상호견제라는 본래의 목적 달성에는 분명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법조계에서도 집단 이기주의의 밥그릇 싸움은 있었다. 더욱 많은 국민들이 양질의 법률서비스를 받게 하기 위하여 사법시험 합격자 수를 늘렸던 때와 로스쿨 제도 도입 때가 대표적인 예다. 그래도 법조계의 항의는 의사들보다는 거세지 못했다. 사법제도에는 명예를 원하면 판사를, 권력을 원하면 검사를, 돈을 원하면 변호사를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겐 담보로 잡을 죽어가는 환자가 없었다. 이 사회의 먹이사슬 최상층에 자리 잡은 고소득집단인 의사나 법조인들이 공익을 위해 사익의 일정 부분을 양보하는 것은 사회정의에 부합하는 일이다. 머리에 붉은띠를 두르고 생계를 위해 투쟁해야 하는 가엾은 노동자들의 피맺힌 절규와는 분명 구분되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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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최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