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미국 대통령 선거 개표 방송을 보느라 다들 잠들을 설쳐서인지, 아니면 아침 기온이 47도로 급강해선지 매일 다니는 바닷가 산책로가 정말 한적하다. 지난 7개월간 코로나로 짐에 안가는 대신 아침저녁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하는 10킬로 산책 중 약 6킬로 구간의 아침 산책길 반환점인 쇼얼라인 골프장의 파킹랏에도 골퍼들의 차량이 텅텅 비었다.
산책로에서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풀밭에 다람쥐처럼 굴을 파고 사는 희귀 보호새로 이 공원의 명물인 땅굴 올빼미(Burrowing Owl) 굴을 지날 무렵이다. 한달 전까지만 해도 거의 매일 보던 60대 후반의 멕시코계 은퇴 공무원 프랜시스코가 오랜만에 ‘하이’하며 반갑게 손을 흔든다. 일년내내 똑 같은 모자, 옅은 녹색의 플리스 잠바와 단촐한 회색바지 차림으로 두꺼운 검정 뿔테 안경을 쓴 근엄한 표정으로 바닷길을 터덕터덕 걸어가는 그의 규칙적인 일상에 나는 경의를 표한다.
좀 지나니 이번에는 내 나이 또래나 됐을까 한 안젤리나다. 눈치만 보다 2달 정도 지난 어느 날 내가 먼저 말을 걸어 인사를 나눈 동구에서 온 듯한 액센트의 그녀도 달포만에 어제·오늘 연이틀 마주쳤다. 쌀쌀한 날씨에 따끈한 맥도널드 커피를 마시며 걷는 내가 부러웠는지 ‘맛있겠네요’하며 은은한 라벤더 내음을 풍기며 지나간다.
경제·군사력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넘사벽, 비교불가의 최강국 미국에서 진행되는 4년만의 지구촌 초특급 이벤트인 대통령 선거라 세계 여러나라 수십억 명의 관심은 온통 개표방송으로 쏠린 밤이 긴장 속에 흐르며 아침이 밝았다. 내게는 미국 시민권을 딴 지 1년만에 처음 맞이한 제46대 미국 대통령 선거다. 세번인가 걸쳐 약 300불을 보냈더니 붉은 성조기가 멋지게 그려진 진푸른 셔츠를 트럼프 캠프에서 보내주었다.
나는 초미의 관심을 갖고 판세를 분석하면서 나의 예상대로 결과가 나오길 간절히 원했다. 선거전까지만 해도 고전할 것으로 예상했던 플로리다와 펜실베니아 등 대형 경합주에서 트럼프가 기대 밖 선전을 하고 있다는 희소식에 나는 마치 내가 대통령이라도 될 것처럼 우쭐해져서는 한국에 있는 친구, 지인들에게 생생한 개표상황 정보를 보내주느라 바빴다.
한껏 고무된 나는 김해에 사는 67세의 큰 누이가 엄마 같은 정성으로 바리바리 챙겨 어제 보내준 간편식 포장음식 중에서 육개장과 앙증맞은 깻잎무침 통조림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마켓서 사온 갖은 나물과 계란 프라이 2장을 고봉밥에 얹고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어 맛있는 비빔밥을 만들었다. 따끈하게 데운 육개장에 한해가 저물어가는 이맘때면 꼭 사서 음미하는 달쭉한 송년주 에그노그 두잔을 반주 삼아 디너를 즐기고 밤 11시경 행복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역사는 밤에 이뤄진다더니 샤워를 마치고 아침 산책을 나가기 전 아침 뉴스를 접한 나는 내 눈을 의심하였다. 밤새 포만감에 빠져 깊이 잠든 사이에 개표가 시작된 미시간 주의 막판 우편 투표함에서 무려 ‘13만표: 0표’라는 이상하리 만치 압도적인 바이든 몰표가 쏟아져 상황이 반전돼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최종 선거결과가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지난 선거 때부터 트럼프 대통령을 그렇게 미워해 역으로 그로부터는 ‘가짜언론’으로 매도당하는 등 피차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한 CNN등의 방송에서는 이번에도 오기에 가까운 90% 이상의 확률로 바이든의 우세를 점쳤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바이든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난 채 고전하다 막바지에 가까스로 승기를 잡는 듯한 상황이다. 누가 당선되던 그들은 이번에도 언론사로서의 신뢰성에 또 한번 커다란 타격을 입는 것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언론의 존재 이유는 선호하는 후보에 대한 바람 잡기식 여론몰이나 희망사항을 전달하는데 있는 게 아니라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사실 보도, 정확한 여론 조사를 통한 민심의 객관적인 전달을 하는 데에 있는 것이라는 본분을 재차 망각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낯 뜨거운 일이다.
나는 이번 지구촌 최대의 자유민주 방식 대통령 선거의 진수를 바라보면서, 4년마다 선거를 치르느라 임기의 25%에 해당하는 근 1년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불확실 속에 보내야 하는 미국 체제가 종신집권의 길을 열어놓은 시진핑 체제하의 중국식 전체주의와 대결하는데 있어서 과연 얼마나 오래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깊은 회의가 든다. 트럼프가 없는 미국은 중국의 파상 공세에 속절없이 수세에 몰릴 것이란 걱정이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으니 이를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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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환 / 실리콘밸리 부동산업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