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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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가야금과 이별 중입니다

2020-11-05 (목) 손화영 (가야금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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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조 가야금 하나가 많이 아프다. 조금 퇴색되었지만, 여전히 반짝이는 소리로 ‘나 아직 살아 있소’ 한다. 아픈 내색은 하지 않지만, 나이가 들어 거뭇거뭇해졌다. 필시 주인이 습도 관리를 잘 하지 못해 나이 든 몸에 병이 들었을 것이다. 매일 보면서도 조금씩 달라진 악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언젠가는 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지금은 그저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았다. 필시 그동안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가야금은 여느 서양악기와는 달리 수명이 짧다. 좋은 가야금을 만들기 위해선 수십 년 이상 된 질 좋은 나무를 자연 상태 그대로 건조해 만들지만, 일단 악기로 탄생하면 청아한 소리는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차 둔탁해져 자신이 탄생하기 전 자연에서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 내던 시간만큼은 맑은 소리를 내지 못한다. 따라서 가야금 연주자들은 여러 대의 악기가 필요한데, 한때는 연주용이었던 좋은 악기가 세월이 가면 연습용 악기가 되어 그 자리를 내어주곤 한다.

나와 30년의 세월을 함께한 이 세 번째 악기는 가장 화려했고 여전히 도도하다. 악기장이 안족에 처음으로 금박을 입히던 때에 태어난 이 악기는 배에도, 비행기에도 실려 청중과 함께 기뻐하고 울었으며 웅장한 오케스트라 사이에서도 독보적인 소리를 뿜어냈다. 내 철없던 10대를 성장하게 해주었고 까칠했던 20대를 가장 빛나게 해주었다. ‘싸랭’ 하고 진양조 첫 가락이 울릴 때면 숨이 멎을 듯한 청아한 소리로 무대에서 빛나던 악기, 수많은 대회에서 나의 긴장을 흥분으로 바꾸어 주던 악기, 5년 후 새로 자리한 연주용 악기에 한발 뒤로 물러나고서도 오래도록 든든히 무대를 지키던 악기였다.

기억 속의 예쁜 노리개를 지녔던 내 여덟 살의 첫 악기부터 열 살의 데뷔 무대를 장식한 이제는 빛바랜 푸른 부들의 악기 등 작은 방 한쪽에 줄줄이 늘어선 악기들을 보자니 그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무대에서도 무대 밖에서도 그리고 이곳 먼 이국땅에서도 내 모든 기억과 순간을 함께 했다. 자그마한 손으로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악기를 부여잡고 다니던 어린 시절처럼 나이 든 지금의 나와 앞으로 다가올 더 성숙해질 시간을 조금 더 힘내어 함께 하길 바라며 내 아픈 손을 덤덤히 어루만지는 이 악기와 오늘 하루의 연습을 마무리한다.

<손화영 (가야금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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