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다. 하나의 ‘1’로 한 해를 밝히며 달려왔던 시간에서 어느덧 두 개의 ‘1’이 서로 어깨를 마주했다. 그곳에는 처음 시작을 기억하는 ‘1’이 있고 그 처음과 같은 또 다른 ‘1’이 거울처럼 마주한다. ‘11’이란 숫자는 숫자로만이 아닌 새해를 맞이한 첫 달의 나와 이후 열 달의 시간을 살아낸 후 마주한 지금의 내가 만나 다음의 나를 준비하는 시간으로 다가온다. 마주한 ‘1’은 서로 같은 숫자임에도 그전의 ‘1’과는 다른 ‘1’이다. 그전의 내가 아니고 그전의 우리가 아니다. 12월이 오기 전 한 해를 돌아보며 새해 첫날 품었던 소망들과 주변을 기억하며 마무리하지 못했던 일들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11월의 경계이다.
올해는 Covid-19로 송두리째 붙들려 있었던 시간이 많았다. 비단 한 개인의 이야기뿐이랴. 수많은 이들이 올 한 해를 보내며 질병과 산불 등 기후와 환경적 영향, 정치적 갈등과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이별과 아픔, 갈등을 견뎌내야만 했다. 그러나 그 붙들린 공간 속에서도 시간은 흘렀고 사람들은 Covid-19 전 시대와 같은 정상적인 시간에서는 하지 않았거나 미뤄왔을 일들에 집중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자신의 내면과 세상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는 시간을 갖은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생각이진 않았을지라도 많은 이들은 그랬을 것이다. 바삐 달리는 기차에 몸을 싣고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던 것과 달리 정차역에 내려 바라보았을 때 느끼는 세계와 풍경은 사뭇 다르듯이. 코비드 19 시대를 통과해 가는 우리는 코비드 전과 후의 경계에 서 있다. 정차역은 두 세계에 미묘한 경계를 지으며 우리의 발걸음을 기차에서 땅 위에 내딛도록 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드영 뮤지엄의 갤러리에 베이지역에서 활동 중인 조각가 최세훈(데이비드 최) 작가의 작품 “Human Life”가 전시 중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 같은 예술가의 길을 걸어가는 어수자 작가와 함께 도미하여 베이지역에서 활동해 온 작가로 후드 청소와 카페 등을 운영하면서 작품 활동을 해왔다고 한다. 팬데믹은 예술가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달리던 기차가 멈추듯 생업을 위한 공간의 닫힘은 반면 작품 활동에 대한 시간의 열림으로 새로운 작품들을 낳았고 여러 작품이 세상 속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Human Life”는 그의 작품 시리즈 중의 연속성에 있었다. 작가는 사람의 형상들을 나무판에 음각과 양각을 대비시켜 제작한 후 겹겹의 한지를 붙여 두드리는 기법을 사용하여 판화 부조로 찍어내었다. 이러한 과정은 양각과 음각이 뒤바뀌어 음은 양이 되고 양은 음이 되어 결국엔 하나로 귀결된다는 철학적 의미가 담겨있다. 작가는 우리들의 삶 속 희로애락이 음과 양의 모습들의 연속성임을 보여준다고 이야기한다. 작가의 작품은 세상 속으로 나오자 작가의 이야기를 넘어 사람들 저마다 또 다른 시각으로 다가오는데 드영 뮤지엄에 전시 중인 “Human Life”는 그의 다른 시리즈 작품들과 달리 중앙에 사선으로 보랏빛 경계를 갖고 있었다. 내게 이 작품은 중세 이탈리아 문학의 중심 서사였던 단테의 신곡을 떠올리게 했다. 베르나르두스의 안내를 따라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하는 주인공 단테가 그 보랏빛 경계를 넘어 여행하며 만난 인간들의 모습들처럼 거꾸러지고 물구나무를 서기도 하고 기도하고 춤추기도 하는 우리들의 모습들이 그곳에 있었다. 보랏빛 경계는 결국 하나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것은 위로였다. 음과 양이 바뀌듯 아직 우리가 그 경계선에 있다면 다시금 이 시간을 넘어 양의 세계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이며 소망이었다.
지난 10월, 코로나로 많은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필요한 이 시기에 또 하나의 위로가 우리들이 서 있는 경계라는 정착역에 도착했다. 올해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미국의 여류 시인인 루이스 글릭(Louise Gluck)이 뽑혔다는 소식이다. 그것은 그녀의 시가 이 시대에 전하는 이야기가 사람들이 정말 필요한 시점에 위로로 다가왔기 때문은 아닐까. 그녀의 시 중 눈풀꽃(Snowdrop)은 아직 봄이 오기 전, 추운 겨울 눈 속에서 피어나기에 눈풀꽃이라 이름지어 졌다고 한다. 류시화 시인이 번역하여 옮긴 눈풀꽃에는 이러한 시구가 있다.
/내가 어떠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가/절망이 무엇인지 안다면 당신은 분명 겨울의 의미를 이해하리라/… 그토록 긴 시간이 흐른 후에 가장 이른 봄의 차가운 빛 속에서 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 기억해 내면서/...나는 지금 두려운가, 그렇다 한다면 당신과 함께 다시 외친다. 좋아, 기쁨에 모험을 걸자’/ 새로운 세상의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
작가의 작품은 그것이 그림이든 글이든 인간의 삶의 모습을 담고 있기에 생명력이 있으며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도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또다시 그때의 의미로 다가갈 것이다.
겨울의 길목에 선 11월을 열며, 정차역에 강제로 내려진 우리도 길을 잃었다고 절망이라는 겨울을 붙들고 있지 않고 다시금 기쁨에 모험을 걸고 나아가길 소망한다. 얼어붙은 땅속에도 꽃을 피워내는 눈 풀 꽃이 자신을 여는 법을 다시금 기억해 내었듯, 자신을 여는 법을 기억해 내고, 비록 희로애락이라는 반복되는 고리 속에 있다 할지라도 음의 경계를 넘어 양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그들의 위로가 지금 우리의 경계에 함께 하고 있다. 지금 두려운가. 그렇다 한다면 당신과 함께 다시 외친다. 경계를 넘어 기쁨을 붙들자. 멀리서 다가오는 기차의 경적이 기쁘게 들리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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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