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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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교] 코로나가 준 선물 ‘세렌디피티(Serendipity)’--- ‘소확행(小確幸)’

2020-10-30 (금) 이상원 (투자회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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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렌디피티는 '원하지 않았는데 예기치 않게, 운수 좋게 새로운 것을 발견해내는 능력 또는 우연히 얻은 경험이나 성과'를 일컫는 페르시아어 '세렌디프'에서 유래된 영어단어로 ‘행운’을 뜻한다. 영국의 정치인이자 문필가인 월폴이 1754년 친구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세렌디프의 세 왕자' 비유를 들었는데, '미처 몰랐던 사실을 우연하면서도 지혜롭게 발견하는 모습'의 의미로 처음 사용하였다. 완전한 우연으로부터 중대한 발견이나 발명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플레밍의 페니실린이나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이 사례이다.

코로나 사태로 지난 3월16일 타인과의 접촉 제한 및 불필요한 외출을 금지하는 ‘쉘터 인 플레이스’ 명령이 내려진 후 7개월이 흐르면서 삶에 변화가 생겼다. 술자리와 축구를 잃은 대신 반려견과 산책을 하고 독서를 하고 요리를 즐기고 정원을 돌보고 음악감상을 하고 홈트레이닝으로 운동을 하며 생활하고 있다. 이런 소소한 일상 속에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뜻하는 소확행(무라카미 하루키 ‘랑겔한스섬의 오후’ 수필집의 신조어)이 있었고 ‘드라마 시청’은 코로나가 최고의 선물이었다. 참고로 하루키 작가는 “막 구운 따뜻한 빵을 손으로 뜯어먹는 것, 오후의 햇빛이 나뭇잎 그림자를 그리는 걸 바라보며 브라암스의 실내악을 듣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등으로 소확행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기존에는 행복을 먼 미래에나 도달할 수 있는 큰 목표의 성취 이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소확행은 현재 삶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확실한 행복에 집중하는 것이다. 자칫 과소비로 연결되는 ‘한번뿐인 인생, 지금을 즐기자’라는 ‘YOLO(You Only Live Once)’에서 소확행으로 트렌드가 변환되고 경제활동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재편되는 디지털 시대로의 전환이 가속화되는 시기에 코로나 규제로 비대면 서비스 이용이 확대되고 있다. 가장 많이 증가한 항목이 실시간 원격 영상시청이라고 하는데,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소위 ‘카우치 포테이토’가 되어 웃고 울고 있다.


하루를 마감하며 와인 한잔과 시작하는 안방극장은 소파에서 잠이 들거나 밖이 환해질 때 잠자리에 들 때가 대부분이다. 우편시스템을 활용한 DVD 대여서비스로 시작하여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장악한 코로나 사태의 최대 수혜주인 ‘넷플릭스’를 창업한 ‘리드 헤이스팅스’ 덕분에 편하게 돌려보고, 이어보며 희로애락의 롤러코스터를 즐기고 있다. 재미와 감동에 몰입해서 자제력을 잃고 다음편을 계속 보게 되는 중독성 패턴의 일상이다. 몇십 년 흘린 눈물보다 많은 회수의 많은 양을 드라마를 보며 흘리고 있다.
대학시절 무협비디오 시리즈에 빠져서 밤샘하다 고생하며 빠져나온 경험이 있기에 드라마 대신 영화를 선택하여 ‘기생충’으로 시작해서 봉준호 감독의 입봉작 ‘플란다스의 개’까지 Netflex, Hulu의 모든 한국영화 콘텐츠를 섭렵하였다. 하지만 결국 ‘나의 아저씨’를 필두로 ‘응답하라 1997, 1994, 1988(응팔)’시리즈로 화룡점정을 찍으며 중독되어 드라마 덕후폐인이 되었다. 지금은 ‘사랑의 불시착’에 매료되어 통일을 꿈꾸고 있다. 탈북민 단체에서 한인회에 연락이 와서 탈북자분들과 북한실정을 논의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필연처럼 느껴진다.

기본 유머코드에 눈물샘을 자극해서 거의 매회 박장대소, 요절복통하게 하고 눈물을 뺀 '공감코드 감성팔이' 작품은 ‘응팔’이다. 특히, 이 드라마에 빠져들었던 건 뜨겁고 순수해서 시리도록 그리운, 바나나가 최고의 과일이던 딱 내 시절 이야기이기 때문이다(맞다, 그땐 그랬다 하며 아득하고 아련해지며 부지불식간에 흐뭇한 웃음을 짓게 되고 콧날도 시큰해지고…그 잔잔한 치명적 매력에 빠져 밤을 태웠다). 시청하는 동안은 감정이입이 되어 과거와 현재의 기억을 떠올려 회고하는 추억이 현실이 된 시간이 되었다. 반성이 돌아갈 수는 없어도 돌아볼 수는 있다고 하는데 돌아보고 미래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드라마 시청이란 내가 찾은 소확행은 따뜻한 햇볕, 시원한 바람처럼 일상에서 자주 느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나는 이러한 행복을 추구하는 시대의 도래가 반갑다. 기성세대의 주입식 교육으로 정형화되고 획일화된 행복의 틀에서 탈피해서 다양하면서도 개별적인 행복의 기준이 제시된다는 점이 의미있고 반갑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성적을 뒤집은 적성이다. 적성을 무시한 채 불철주야, 주야장천 죽기 살기로 공부해서 대학에 진학하고 고연봉 대기업에 취직한 후 가정을 꾸리고 고급차에 아파트 평수를 넓힐수록 행복이 올까? 소확행은 행복의 기준을 개개인이 적성에 맞게 정하기 때문에 틀에서 벗어난 행복들이 무한하게 생겨날 수 있다. 행복은 갖기 어려운 대상들을 소유하고 나서 느끼는 감정이 아닌, 자연의 변화를 감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관건이 된다. 아등바등, 버둥버둥 살지 않아도 주어진 삶을 즐길 줄 아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태도에 달려있다.

행운을 만났으니 행복은 나의 몫이다. 코로나가 선사한 행운의 선물인 소확행은 안분지족의 행복이다. 행운은 만나는 것이고 행복은 만드는 것이란 주철환 교수님의 말씀이 가슴을 채운다. 독서, 영화/드라마 감상의 재미와 감동을 다시 찾은 나는 행복하다. 또 어떤 마음에 드는 책이나 영상 보물을 우연히 만나 마음부자가 될지 기대감에 설레며 더 많이 읽고 보고 느끼고 값진 경험을 더 많이 공유하겠다고 다짐한다.

더 좋은 날은 지금부터고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상원 (투자회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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