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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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범 내려온다

2020-10-29 (목) 손화영 (가야금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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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주둥이 벌근허고 얼숭 덜숭한 게 토토토 호생원 아니오?” 별주부가 수로만리를 아래턱으로 밀고 나와 아래턱이 뻣뻣하여 토끼를 부른다는 것이 토자를 호자로 붙여 불러보니 첩첩산중의 호랑이가 생월말 듣기는 처음이라 반겨 듣고 내려오는디.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장림 깊은 골로 대한 짐생이 내려온다.”

토끼전 또는 별주부전으로 잘 알려진 판소리 수궁가의 일부로 조선의 명창 이날치를 오마주하여 작명한 밴드가 노래를, 한복을 모티브로 한 독특한 의상을 입은 댄서들이 감각적인 춤을 추는 이 신명 나는 영상은 최근 한국관광 해외홍보 영상으로도 제작되어 전 세계에 널리 소개되고 있다.


전 세계의 유일한 1인 오페라, 판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는 완창에는 장장 몇 시간이 걸린다. 수궁가도 전통적으로 세 시간 가량이 걸리는데, 이 긴 시간을 소리꾼과 청중이 함께 버티다 보면 음악을 귀로 들어 뼈에 새긴다고 한다. 수궁가는 판소리 다섯 마당 중 동물을 소재로 한 유일한 판소리로 신라시대 김춘추가 고구려에 갔다가 기지를 발휘해 탈출한 구토설화가 그 기원인데 이 고릿적 이야기가 최근 젊은이들이 가는 클럽을 떼창으로 달군다. 가사에서 보다시피 해학이 가득 담긴 범이 내려오는 부분을 1분 30초 가량 뚝 떼어 오로지 다같이 즐기기 위한 음악으로 만들었다. 이 영특한 시도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기나긴 판소리를 너도 나도 들썩이며 따라 부르게 만들었다. 조선시대 여러 사람이 모인 놀이판에 소리꾼이 관객과 대화하며 구성진 이야기를 풀어가는 본래의 뜻에 맞게 이 젊은이들은 정통 콘서트홀이 아닌 대중적인 클럽에서 제대로 한판 같이 놀아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옛것을 제대로 즐기며 음악을 하는 이들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것이 바로 현대판 판소리인 것을.

자유롭게 왕래하지 못하는 코로나19의 시대, 자라의 말이 반가워 산길을 뛰어 내려가는 첩첩산중의 호랑이처럼 훗날 우리를 부르는 반가운 소리를 기다리며, 정겨운 소리와 그리운 풍경이 가득 담긴 한국홍보 영상을 보며 바다 넘어 함께 어깨를 들썩여본다.

“얼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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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영씨는 가야금 연주자이자 작곡가이다. 86년 KBS로 데뷔하여 이후 케이팝 밴드(K-pop band)와 한국 최초 컬래버를 했고 독주회, 협연, 초청 연주, 음악 강연회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손화영 (가야금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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