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차가워진 가을 밤, 얇은 커튼을 슬며시 밀치고 들어온 달빛에 잠이 깨었다.
커튼을 활짝 열었다. 옹졸, 냉대, 비겁, 무시, 질투 등 세상의 추함을 새까만 밤 하늘에 다 녹이고 연노랑 보름달이 온 천지를 밝히고 있다.
그 풍성하고 넉넉한 달을 한참 쳐다 보았다. 잠은 완전히 달아났다. 자주 듣던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가 귓가를 스친다. 베토벤이 30세쯤에 작곡해서 그렇게 좋아 했던 애인 ‘귀차르디’를 위해 헌정했다지만 사랑을 이루지 못한 곡이다. 1악장 대부분이 귀에 맴돈다. 잔잔하면서 감성적인 감미로움이 흐르는 곡이다.
알 수 없는 허전함이 가슴을 파고 든다. 적막을 바느질하는 달빛 속에서 외로움이 느껴진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가장 진실할 때가 가장 외로울 때이다. 한 개의 촛불을 마음에 켜고 싶을 때이다. 나이가 들수록, 만나면 마음이 편해지고 품격과 여운이 남는 따뜻한 친구가 생각난다.
몇년 전 LA 엄마집에 놀러 갔을 때 하이웨이를 겁내는 대학동창이 서너시간이나 걸리는 먼 길을, 그것도 아침 복잡한 시간에 혼자서 운전하고 와서 날 놀라게 했다. 좋은 친구라면 아무리 먼 길이라도 즐겁게 갈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며 친구는 웃었다.
친구는 내게 인생의 즐거움과 가치를 느끼게 했다. 만나면 기분 좋은 친구, 힘들 때 손잡아 주는 친구, 영원히 내 곁에 남을 것 같은 그런 친구들의 모습이 빈 공간을 채우고 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한 인생에서 서로 안부를 묻고 동행하는 친구를 가진 삶은 행복하다. 사랑과 배려가 있는 우정은 고적한 인생길에 귀중한 재산이고 삶에 활력을 준다. 워렌 버핏의 일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지금 위치에서 과거에 배운 교훈들을 돌아볼 때 성공을 어떻게 정의 하시겠습니까?” 버핏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어떤 사람은 성공이란 원하는 것을 많이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 나이가 되면 당신이 사랑해 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당신을 사랑해 주면 그게 성공입니다.”
행복해지려면 자기 남편이나 아내, 형제, 자식과의 사랑을 떠나 영원을 꿈꾸며 서로 돕고 돌보는 진실된 친구들이 필요하다. 맑은 강물처럼 조용히 흐르면서도 은은하고 신선하며 인생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다.
최근 한 의학연구에 의하면 좋은 친구를 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20% 수명이 더 긴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나 좋은 친구를 갖는 것은 쉽지 않다. 우정은 친구가 곤궁에 처해서 도움의 손길을 뻗을때 본심이 나타난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외면해 버리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어려울 때 성심껏 대해주고 사랑과 희생으로 나쁜 행동은 막아주고 잘못은 감싸주며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이다. 극도로 이기적으로 사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꽃피는 봄에는 예쁜 꽃잎을 따서 머리에 꽂아주고, 녹음이 우거진 여름이면 숲속 계곡을 흐르는 물속에 발을 담구며 짜릿한 전율을 느끼고, 단풍드는 가을에는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아픈 가슴을 달래고, 함박눈이 쏟아지는 겨울에는 눈속에 푹푹 빠지고 미끄러지면서도 볼이 발갛게 되도록 걷던 친구들….
깔깔대며 붙어다니던 그 친구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언젠가 서랍을 정리하다가 옛 사진들과 편지를 보았다. 빛바랜 사진속의 모습은 여전히 웃고 있는데, 흐르는 세월따라 잊혀진 얼굴도 있고, 눈처럼 쌓인 그리움에 눈물을 고이게하는 얼굴도 있다. 꾹꾹 눌러 쓴 누런 편지는 읽기도 힘든 글자에서 정다운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편지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달빛은 여전히 밝게 비추고 있다. 부드럽고 변함없는 달빛처럼 세상 떠나는 날까지 연락하고 정답게 지낼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는 내 인생 최고의 소중한 보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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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잔 / 워싱턴 두란노문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