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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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바다] 꽃 선물은 많이!

2020-10-26 (월) 신선영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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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소 브런치로 아보카도를 즐겨 먹는다. 동그란 씨앗을 깔끔하게 도려낸 적이 있는데 그냥 버리기 아까워 집 앞에 심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초등학생 시절, 그 쉽다는 강낭콩 키우기조차 실패하곤 했던 나는 식물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어떤 장비나 사전 조사도 없이 손으로 땅을 움푹 파서 동그란 씨앗을 푹 묻어두고 나왔다. 초록색 열매 살이 하나도 묻지 않고 깨끗하게 도려진 씨앗이 조금 특별하게 느껴져 쓰레기통 대신 땅에 버린거나 다름없었다.

허기진 배를 움츠리고, 때로는 지치고 황급한 마음을 붙잡고 오가는 발걸음이 반복되고 한두 달쯤 지나서였을까? 기대하지도 않았던 그 자리에 싹이 텄다. 단지 내 꽃들과도 많이 동떨어진 곳에, 성의 없게 묻어두었던 터라 내가 심은 씨앗이 분명했다. 인터넷에 찾아본 바 다른 아보카도 새싹처럼 분명하게 구분된 마디가 있는 얇은 줄기와 벌어지는 잎사귀 모양이 흡사했다.

분명 별다른 기대도 하지 않았던 생명인데 이를 발견하고부터 금세 기대로 부풀었다. 할아버지를 발음하지 못해 “하비”라고 부르던 동글동글한 얼굴의 꼬마 친구를 기억하며 이름은 “아비”로 짓기로 했다. 평소 눈길도 주지 않던 흔하고 많은 식물 가운데 그 흔한 예쁜 꽃 하나 없는 작은 새싹이 나에게 이름과 의미가 생기는 건 정말이지 특별하고 설레는 경험이다.


지금까지 반려 식물을 키우거나 원예를 취미로 하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애완동물은 귀엽기라도 하지만 식물 키우는 일은 너무 일방적이고 느리다고 생각했다. 식물이 와서 살랑살랑 애교를 피우기를 하나, 또 꽃이 피고 열매 맺는 과정이면 한참인데 (물론, 아보카도 역시 열매를 맺으려면 10년 남짓 걸린다고 한다) 비효율적이고 번거롭게만 느껴졌다. 참을성과 섬세함이 부족한 나에게는 더욱이 어려운 일 아니겠는가?

다행히 세심한 관리 없이도 나의 “아비”는 무럭무럭 자라났다. 폭풍 성장을 눈에 담으려고 쭈그려 앉아 미소짓던 시간이 차곡히 쌓였고 별다른 것 없던 집 앞 풍경을 기대로 맞이했다. 가끔 아비의 성장에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도 나의 마음은 따듯해지고 생각은 윤택해졌다. 어느새 내 마음에 들어온 작은 생명은 나를 위로하고 성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아비는 다른 식물들 사이에서도 눈에 띌 만큼 자랐다. 그리고 어느 날 아비가 허무하게도 제초 당해 없어졌다. “하긴, 누군가에게는 잡초였겠지… 더군다나 내 정원도 아니었고…” 하지만 그 빈자리가 생각보다 컸는지 아이처럼 눈물도 났고 아쉬운 마음에 꽤 오래 가슴이 먹먹했다.

나는 꽃 선물이 세상에서 제일 부질없는 짓이라고 선언하던 스무 살이었다. 이유를 묻는다면 영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답했다. 그렇다. 꽃은 잠시의 싱그러움을 선사하고 금방 시들어버린다. 말라 비틀어져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쉽게 으스러져 버리는 쓰레기가 되어 버린다. 제대로 관리해주지 않으면 냄새도 나고 벌레도 꼬일 수 있겠지. 시들다 못해 파편처럼 부서지는 모양새를 보면서도 굳이 사랑과 아름다움을 떠올려야 할 것 같은 책임감, 스무 살 남짓 나에게는 비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단연 나는 어리석고 비겁했다. ‘여성스럽다’ 생각되는 행위는 거부하겠다는 센 척이었나? 혹은 그렇게나 빠르게 아름다움이 시들어버리는 모습을 지켜볼 용기가 없었나? 선물처럼 찾아온 섬세한 생명을 가까이하면서 확실히 느낀 게 있다. 꽃이 시들어 버릴 때가 되더라도, 아무리 그 모습이 초라하더라도 예쁜 마음을 선물 받은 이에겐 영원한 꽃, 절대 쓰레기가 될 수 없다. 누군가에게 잡초에 지나지 않았을 아비가 나에겐 영원히 이름있는 선물인 것처럼 말이다.

아비가 없어지고 나서도 나는 오래도록 아비의 모습을 기억하고 애정을 곱씹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애정 깃든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 생명을 지나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꽃 이름, 풀 이름을 하나씩 배워나가는 기쁨이 대단하다. 꽃의 작가라고도 불리는 박완서, 생전에 “작가는 사물의 이름을 아는 자”라고 소개했다 한다. 깨지기 쉬운 마음을 돌보고 기록하는 작가에게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은 이름을 아는 것, 즉 애정을 쏟는 경험일 수도 있겠다.

식물의 이름을 알아가며, 성장을 눈에 담는 행복을 만끽하며, 그리고 생명의 유한함이 종종 가르쳐주는 소중함과 책임을 배워가며, 나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당당히 강요한다. 꽃 선물은 많이!

<신선영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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