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문학상 수상자 루이즈 글릭
2020-10-26 (월)
문성길 / 의사 | 전 워싱턴서울대동창회장
작년 여름 북유럽 여행시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의 자그마한 시청의 2층 중앙 바로 왼쪽의 방이 불현듯 생각이 난다. 안내자의 설명이다. “저 조그만 방안에서 노벨 문학상 심사가 이루어집니다.”
과정이야 알 수 없으나 하여튼 심사장소라니 뇌리에 각인이 제법 된 것 같다.
연례행사의 일환쯤으로 그냥 지나칠 뻔한 노벨문학상에 금년엔 좀 남다른 소회가 생긴 건 동부에 사는 친구가 보내준 수상자의 작품들 중 하나의 시구 때문이라 생각이 든다. 문학엔 문외한이지만 감히 글을 씀에 깊은 이해를 구한다는 말씀을 드린다. 마침 인생을 살만치 산 동년배 작가의 인생역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고 하면서.
간단히 시구 중 일부를 소개하면, 제목은 영어로는 ‘Snowdrops’, 우리말로는 ‘눈풀 꽃’이다. 한문으론 ‘雪降花’(1993년 Pulitzer상 수상작품)다.
작가의 작품 중 유일하게 한국어로 번역(역자 류시화 시인)되었다는, 특히 마음에 와닿는 이 시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내가 어떠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가. 절망이 무엇인지 안다면, 당신은 분명 겨울의 의미를 이해하리라~. 대지가 나를 내려 눌렀기에, 내가 다시 깨어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토록 긴 시간이 흐른 후에 가장 이른 봄의 차가운 빛 속에서 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 기억해 내면서~ 좋아, 기쁨에 모험을 걸자. 새로운 세상의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
몇 백 년을 비, 눈, 바람 등 온갖 역경을 겪고 첩첩산중 바위틈을 비집고 나온 낙락단송(落落短松)들이며, 지옥불보다도 더 뜨거울 용광로를 거쳐 나온 단련된 강철(强鐵)은 아마도 고난으로 대표되어진 역경 속에 나온 최상의 작품일 것이다.
이에 비견될 수 있을 작가의 ‘눈풀 꽃’ 시를 감상하노라면 작가의 살아온 인생길을 아련히 보는 느낌이다. 차가운 긴긴 겨울을 이겨내고 이른 봄소식을 알리듯 다시 솟아나는 불굴의 생명의 귀환이랄까, 부활은 온실에서의 화려한 화초들과는 또 다르지 않을까.
각 분야의 대가들, 특히 예술방면에서 그러했듯이, 작가는 병약했기도 하였지만 문학적 재능이 남달라 남들처럼 대학 전 과정을 수학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인문학의 요람, 사라 로렌스(Sarah Lawrence)대학과 콜럼비아(Columbia)대학교에 잠시 적을 두었을 뿐이었지만 작가의 재능이 학위가 없다고 어디 가겠는가.
한국에서도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오래전 작고하신 박재삼 시인도 이런 범주에 속한 분인 걸로 알고 있다.
이때는 아마도 한참 육체적 고통(신경성 무식욕증, Anorexia Nervosa)의 와중이었을 성 싶다. 허나 굴하지 않고, 작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넓혀가지 않았을까?
평전을 보면 작가는 삶과 죽음, 가족관계, 자연과 역사에 대해 깊은 사색과 고뇌를 일생의 화두로 내걸었던 듯 싶다.
처음엔 10년에 한권의 시집과 수필집을 발간, 후기엔 속필하여 총 12권을 발표한 것을 보면 갈고 닦은 후에야 그들을 세상에 선보였던 것 같다. 복잡한 뉴욕에서 태어났지만 예술인들의 로망 버몬트 주 산골에 정착한 작가의 심성이 그대로 느껴진다. 나의 은퇴 후 있는 건 그 많은 시간뿐이니 작가의 수필집도 종종 읽어볼까한다.
<문성길 / 의사 | 전 워싱턴서울대동창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