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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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Homeless Not Hopeless

2020-10-23 (금) 신정은 (SF한문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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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북서단에 있는 랜즈 엔드(Lands End)는 사람이 손대지 않은 자연과 해각과 해협을 배경으로 한 땅끝 공원입니다. 이 아름다운 해안 산책로에서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입구에 서 있는 구부러진 나무들입니다. 대양 위의 암벽을 휘감고 나아간 바람에 잎과 가지가 휘어진 나무는, 바다와 육지의 두려운 경계를 고스란히 담고 있지만, 그럴수록 바람을 이겨내려는 희망을 더욱 강렬하게 느끼게도 합니다. 그렇게 두려웠던 경계의 흔적과 갈망이 나무도 사람도 있습니다.

그 젊은 노숙자를 발견한 것은 집으로 돌아가던 프리웨이 입구였습니다. 퇴근길 혼잡한 차량들 속에 한 남자가 팻말을 들고, 차도와 인도의 경계에 위태롭게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안하게만 보였던 모습과는 달리, 팻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Homeless, not hopeless”-노숙자라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가족과 집을 잃었는지 모르지만, 온기도 울타리도 없는 바람 찬 길의 끝에서 희망을 선택한 사람은, 희망이라는 말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의 희망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를 다시 볼 순 없었지만 기억은 강하게 남아, 어린 아들과 기차역이나 교회 대피소를 전전하며 노숙생활을 했던 크리스토퍼 가드너가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이야기를 들을 때나, 지나가는 차량 운전자에게 자신의 이력서를 나눠주던 노숙자가 직장을 얻었다는 기사를 접할 때면, 한 젊은 노숙자를 다시 떠올리며, 그들이 삶을 버틸 수 있었던 힘을 헤아립니다. 희망과, 땅끝까지 다가갔던 절망만큼 무거웠던 희망의 무게를요.

고백록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무게란 밑으로 미는 것만이 아니라 제자리로 기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마다 제 무게로 움직여, 제자리로 찾아갈 때 참다운 안식이 있다고 말입니다. 2020년을 살아가는 우리의 무게는, 각자 스스로를 짓누르고 있는 삶의 무게만큼 힘겹습니다. 그럴수록 부단히 움직여 제자리를 찾아간다면, 희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 씨앗처럼 그 절망의 땅에서 돋아날 것입니다. 당신을 위해 역경 속에 반드시 깃들어 있는 숨겨진 축복을 빕니다. 아울러 평범한 일상에서 발견한 특별한 감사함과 놀라움과 사랑을 고백하면서, 글로 남기지 않았다면 잊혀지고 말았을 어떤 기억들과,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이어주시는 그분께 감사드립니다.

<신정은 (SF한문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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