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집에 살 때의 일이다.
문 앞 지붕가에 새가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요지부동, 움직이질 않고 먼 하늘만을 쳐다보고 앉아 있었다.
그것이 새끼를 품은 어미 새의 모습이란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후 한마리의 다른 새가 앉아 있는 어미 새에게 간간이 먹이를 나르는 모습이 보였다. 아빠새 일까? 아무튼 그래 보였다. 그렇게 그들은 나를 가르치고 지나 갔다.
세상의 이치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 마음만 먹으면 깨우칠 것들이 많다.
요새는 하루하루가 새롭고 아주 신이 난다. 먹이를 날라다 주는 것이 어디 새 뿐이랴?
남회근이 쓴 공자의 '주역계사'를 읽을 때의 일이다.
세상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이런 세계가 있구나, 이런 경지가 있었구나 생각이 들며 무척 경이로웠고 한편 송구스러웠다.
그 책을 책상 한 켠에 놓아 두며 감히 두려움의 손으로 만져 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새로운 세상은 성스럽다. 모든 것이 모아져서 일시에 터지는 경망(驚茫)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일어날 것이 일어나나 그것은 이유없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인생은 또한 자존심의 세상이다.
너와 내가 구분될 때 상대적 '자존심'이 생겨 난다. 아니 하늘과 땅 사이에 나 하나만 존재해도 같이 있는 것이 자존심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했는가?
인간의 마음의 바다에서 생기는 것이 무수히 많겠으나, 그 시작과 끝이 바로 이 자존심이다. 그리고 자존심은 승부를 만든다.
존재의 어떤 DNA가 그렇게 자존의 감각과 승부심을 만드는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그것에 목숨을 건 예는 많이 있다. 특히 양심과 진리 앞에서의 자존은 쉽지 않은 인내와 투쟁을 요구하기도 한다.
아테네의 거리에서 자유영혼의 진리와 그 행동을 외치는, 그리하여 아테네의 쇄신을 부르짖는 소크라테스에 부담과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의 법정 고소는 말없이 있던 집단 컴플렉스에 불을 질렀고 결국 ‘사회소요’죄를 들어 극형의 선고를 내렸으나 그들인들 몰랐을까? 그가 무죄인 것을. 감옥문을 잠그지 않고 있었다 한다. 모두들 내심 그가 탈출해 주기를 바랬던 것 같다. 많은 친구들이 모두 탈출해 나가기를 권했으나,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택했다. 아마 작은 목숨과 큰 목숨을 비교해 봤을 것이다. 밖으로 나가서 목숨을 구하면 대신 잃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도 깨달은 진리에 대한 자신의 자존심이 한몫 했을 것이란 생각은 자연스럽다. 바로 깨달은 자의 자존심이다. 진리에 대한 신념은 저승의 법률을 지켜야 하는 의무감을 고취하고 죽음으로써 이승과 저승의 법 모두를 쟁취하는 길을 그는 택했다. 그는 그 나름대로 큰 목숨을 구하는 승부를 건 것이다. 인생은 신과 인간의 싸움이다. 어쩌면 신은 인간의 승부사를 통해 신의 길을 닦고 있는지 모른다.
소크라테스가 남긴 유언 중에 ‘닭 한 마리’를 갚아 달라는 말이 있다. 닭 한 마리가 치유 받은 자의 신에 대한 헌납 임을 알 때, 그는 이미 그의 죽음이 ‘어미 닭’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알 속에서 세상의 문을 두드리는 새끼를 위해 밖에서 같이 쪼아주는 어미의 ‘줄탁동시’는 새로운 세상으로의 문(門)을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
과연 우리의 어미닭은 어디에 있을까? 혼자서 문을 열기에는 너무 힘들다는 것을 많이 느끼고 살았다. 몸도 어딘가 뚫어 주어야 에너지가 들어가고 기혈이 돌지 않는가?
문을 열어 줄 스승을 찾는 마음은 어쩌면 무척 자연적이다. 바로 살기 위해서이다.
바로 살려면 우선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명경(明鏡)에 자기의 모습을 비추어 보듯, 문(門) 안의 고요와 적막에 자신을 자세히 비춰 보아야 할 것이다. 나를 정확히 바라봄으로 인간의 모습이 보이고 아울러 그 한계와 무지 등이 보일 것이고 더 나아가 신의 뜻과 자존의 의미도 깨닫지 않겠는가? 어쩌면 생의 지도와 Code도 내 안에 들어 있을지 모른다. 거울에 비치는 지난 세월의 죄와 쌓은 업의 인식은 우리를 자정(自整)케 하고 회개의 시간과 함께 다음 문을 여는 열쇠가 되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깨우치려는 자에게 기회는 오고 빈 곳으로 기(氣)가 들어 옴은 천지의 이치이다.
이 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신세계의 문을 열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그 곳에는 알게 모르게 스승이 있었을 것이고 치유가 있었을 것이니 우리도 닭 한 마리를 신에게 바쳐야 할지 모른다. 바로 다른 누군가를 위해 문을 열어 주어야 하는 빚진 자가 되는 것은 과히 기분 나쁜 일이 아니다.
아침이 되어 세상을 맞이하면 온갖 스승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저녁이 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없이 마음을 비우는 '좌망(坐忘)'의 세계에 들어 간다. 우주가 우리를 품는 성스런 시간 안에서 우리는 ‘알’이 되어 잠잔다. 아침 해는 어미가 되어 우리를 깨우고 우리는 신세계의 문을 열고 나온다. 이런 반복되는 거듭남 속에서 우리는 더 큰 목숨을 위해 승부를 건다.
그것은 오랜 기다림의 부화가 될 수 있고 우주의 새 문을 여는 순간이 되어 새롭고 더 큰 자존심의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바로 철학도, 신학도, 사랑도 자존심의 세계이다. 죽음을 넘어서는 자존심이다. 그 기질을 역사의 성인들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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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영무 (치과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