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퓰리처상 수상자 강형원 기자의 한민족의 찬란한 문화유산 (13) 민간인쇄조보 <상>
선조 10년 1577년 11월24일 날짜의 민간인쇄조보 내용 중에는 인성왕후 공의왕대비 관련 뉴스가 언급되었는데, 공의전(인성왕후 공의왕대비를 모신 궁) 의 쾌유를 비는 기도가 양진 광나루에서 있었다는 내용이다. 공의전 미령교(공의전이 몸이 좋지 않아 임금이 전교하기를) 이라는 문구가 있다. 선조실록에는 11월29일에 ‘공의전이 낫지 않자 대신들에게 다시 기도하도록 전교하다’는 제목에서 선조가 대신들에게 전교하기를 “상전의 병세가 위중하다. 기도는 이미 했지만 다시 기도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내마음이 망극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제12대 임금 인종대왕의 태를 봉안한 태실은 경상북도 영천 은해사 뒷산에 1521년 조성됐다. 태실이란 왕실에서 아기가 태어났을 때 그 태반과 탯줄을 묻는 석실(石室)을 말한다.
세계 최초 활자조판 상업용 신문 민간인쇄조보를 발견한 영천역사박물관 관장 지봉스님은 인종의 태를 모신 태실이 경상북도 영천 은해사 뒷산에 있는 것을 은해사 부주지로 재임할 때부터 알고 있었기에, 440여 년만에 기적같이 발견된 민간인쇄조보에 실린 인성왕후 공의전 소식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역사 중 하나는 선조가 궁을 버리고 피난을 간 사건이었다. 임진왜란 중 왕이 백성과 나라를 버리고 도망갔다고 분노한 백성들은 1592년에 경복궁을 불질러버렸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왕실의 역사와 왕의 행적을 구체적이고 자세히 기록한 것인데, 이때 불타버려 부실하고 빈약한 선조실록(宣祖實錄)을 보완한 선조수정실록은 화재로 소실돼 빠진 중요한 역사를 다시 기록하고 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조선시대 대학자였던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석담일기가 포함돼 있다. 율곡이 조정에서 펼쳐진 경연(經筵)에서의 강연과 정계 동향 등을 일기로 엮은 경연일기는 생생한 기록들에다 본인의 평론까지 포함시켜 선조 때의 사건들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 남아 있다.
1577년 11월28일 선조가 민간인들이 활자로 인쇄한 신문 민간인쇄조보를 보고 크게 진노했다고 조선왕조 선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조보(朝報)를 인출(인쇄)하기 위해 새긴 글자(활자)는 모두 몰입(沒入)하고 인출한 사람들은 의금부에 내려 추국하라.”
이미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인쇄 능력을 보유한 우리 민족이었지만, 선조 때만 해도 활자 인쇄를 통한 정보 전달은 국가와 사찰에서만 독점하고 있었다. 왕실과 중앙정부가 매일매일 필사본(붓으로 쓴 공고문)으로 발행하는 엄청난 양의 국가 독점 관영지인 조보는 전국 각 지역에 파견된 중앙관리와 지체 높은 사대부들에게 중앙의 소식과 그 지역과 관련성이 있는 필요한 내용이 모두 필사본으로 복사되어 전달되고 있었다.
그때 필사체로 국가에서 매일 발행하던 조보(공고문)를 의정부(국무조정실·국무총리비서실)와 사헌부(감사원·헌법재판소)에서 허락을 받고 금속활자와 목활자로 인쇄한 것이 민간인쇄조보다.
민간인쇄조보는 국가 인쇄시설이 아닌 곳에서 자체 활자를 만들어 상업적으로 팔았고, 매일 발행했으며, 관에서 나오는 모든 내용을 그대로 쓰지 않고 독립적으로 간행(편집)했다고 하니 현대의 상업적 일간지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어 세계 최초의 민간 상업신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율곡은 “각 관청과 외방 저리(서울주재 지방 관청 서리)와 사대부에게 판매하니 받아보는 사람들이 모두 편리하다고 생각하였다”고 기록했다.
신문이 역사의 첫 페이지를 쓴다는 언론의 정의를 1577년 당시 선조는 명확하게 이해했는지, 민간인쇄조보의 간행을 중지시켰다. “...두어달 뒤 상(선조)이 우연히 관보를 간행 하는 것을 보고 노하여 이르기를 ‘조보를 간행하는 행위는 사국(史局)을 사설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 만약 다른 나라에 유전(流傳)되기라도 한다면 이것은 국가의 나쁜 점을 폭로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선조실록 과 율곡의 석담일기는 기록하고 있다.
선조가 민간인쇄조보 발행 관련자들을 역모죄를 조사하는 “의금부에 가두고 고문하여 주모한 사람을 추궁하였는데, 그 사람들은 이것으로 생활의 밑천을 삼으려는 것에 불과하였고 사실 주모한 사람은 없었다. 매를 맞아 거의 죽게 되자 형을 정지하자고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대역부도의 법으로 처리하라 하고, 금부에서 과중하다고 아뢰니 그보다 한 단계 낮은 법률을 적용해서 모두 먼 지방에 귀양 보내었다”라고 율곡은 기록하고 있다. <다음주 하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