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아이콘’이라 불리었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 연방대법관이 지난 9월18 일 향년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에 의해 대법관으로 임명된 긴즈버그는 대법관 재직 27년 동안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특히 여성들의 권익신장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러나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 진보파 대법관 자리에 공석이 생김으로써 대법원의 보수화가 불 보듯 뻔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후보자 지명권을 가진 대통령도, 인준 권한을 가진 상원도 모두 공화당 판이기 때문이다.
이런 호기를 놓치지 않고 트럼프 대통령은 긴즈버그의 후임으로 보수파의 거장 고(故) 안토닌 스칼리아 대법관 밑에서 서기를 지낸 에이미 코니 배럿(Amy Coney Barrett) 제7연방항소법원 판사를 후보로 지명했으며 이에 발맞추어 공화당의 매코널 상원 원내대표는 11월 대선 전에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그를 인준하겠다고 화답했다.
보수 대 진보 대법관 4대 4의 팽팽한 대립 속에 스윙 보트로 대법원의 방향을 좌지우지하던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이 2018년 7월 자진 은퇴하고 그 후임으로 보수파인 브렛 캐버너가 임명된 데 이어 이번 공석도 보수파 소장 인사로 충원 되면 종신직인 대법관 신분상 앞으로 미국 대법원은 보수 6 대 진보 3의 불균형이 오랫동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다급해진 민주당의 펠로시 하원의장은 최근 코로나-19 확진을 받은 트럼프의 건강 상태를 놓고 대통령의 직무수행 불능과 승계 문제를 규정한 수정헌법 25조에 관해 논의할 것이라고 불을 지피는가 하면 또 다른 민주당 인사들은 2016년 오바마 대통령 시절 스칼리아 대법관이 사망했을 때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에 대법관을 지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후임자에 대한 청문 절차조차 강력 거부했던 매코널 상원대표의 과거 행적을 들춰내고, 만약 배럿 판사 임명을 강행한다면 차기 국회에서 대법관의 수를 더 늘리는 법안을 발의하겠다고 맞불을 놓고 있다.
하지만 공화당이 상원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상 코로나-19로 인한 돌발사태 등 특별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배럿 판사의 임명은 기정사실로 굳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공화당의 그림대로 배럿이 임명되어 보수파가 수적 절대 우위를 점하게 된 미국 대법원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 우선 공화당의 숙원이었던 여성의 낙태권과 성 소수자의 권리는 축소되고 오바마케어로 불리었던 건강보험 개혁법과 불법체류 청소년 추방유예 제도(DACA)는 폐지 쪽으로 가닥을 잡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중 임산부의 낙태권과 DACA, 성적 성향에 따른 고용 차별법 등은 올해 있었던 대법원 판결에서 보수파로 분류되었던 로버츠 대법원장이 잇따라 진보 성향 대법관들과 보조를 같이한 까닭에 5대 4로 아슬아슬하게 그 명맥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위기를 모면하였지만 배럿이 등판하는 순간 명줄을 다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이와 달리 보수파가 옹호하는 총기 소유와 같은 개인의 전통적 권리는 배럿 판사가 작년 참여했던 캔터 대 바(Kanter v. Barr)사건에 비춰볼 때 한층 강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사건은 메디케어에 의료비를 부당 청구한 혐의로 연방법상 중범죄인 우편사기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캔터가 자신의 형기를 마친 후 중범죄자의 총기 소유를 금지하는 연방법과 위스콘신주 법이 수정헌법 2조에 명시된 자신의 총기 소유권을 침해한다며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이다.
3명의 항소판사가 심리한 이 사건에서 2명은 합헌 결정을 내렸으나 배럿 판사는 소수의견문을 통해 폭력과 비폭력범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중범죄자에게 일괄적으로 총기소유를 제한하는 법은 위헌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자신의 멘토 스칼리아 대법관이 과거의 유사 판결에서 ‘수정헌법 2조가 보호하고자 하는 총기소유의 주체는 민병대가 아닌 개인’이라고 해석했던 성향 등으로 미루어보아 그의 수제자 배럿 판사는 앞으로 총기소유권을 어떻게 넓혀 나갈지 사뭇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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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락/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