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창]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2020-10-20 (화) 02:19:17 송일란 (교회 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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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팎으로 행사는 줄었는데 이상하게도 업무량은 늘었는지 정신없이 바쁘게 보냈다. 잠시 숨을 고르며 멍하니 달력을 쳐다보다 깜짝 놀랐다. 10월, 그것도 가을 한가운데 와 있는데 전혀 느끼지 못하고 지냈다.

늘 햇빛으로 가을이 왔음을 알아채곤 했다. 햇살 한 줄기가 문득 투명하고 서늘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는데, 그것이 나에게는 가을이 시작됐다는 신호였다. 그런데, 올해는 연이은 화재와 꼬리가 긴 여름 때문에 그런 햇빛을 보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다.

몸은 바빠서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마음은 엇박자라 아직도 저만치 뒤에 엉거주춤 서 있음을 느낀다. 이쯤에서 한 박자 쉬어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 쐬러 길을 나섰다. 내달려 간 곳은 역시 가을 산자락 앞이다. 숲을 거쳐 내려온 바람은 소나무 향기가 배어 있으면서도 맑고 차가웠다. 무더위와 화재 연기를 견디고서도 늠름하게 서 있는 나무들은 이제 곧 다가올 겨울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떨굴 것은 떨구고, 여밀 것은 여미어 가벼운 듯싶지만 한편으로는 단단해 보였다. 어미에게서 떨어져 나온 솔방울들은 어디론가 굴러가 제 집을 마련하기도 전에, 밟히고 이겨져 씨앗조차 문드러진 모습인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소나무 숲을 지나고 있는데, 군데군데 단풍이 든 나무들이 눈에 띄었다. 어떻게 소나무 숲 사이에 무리를 지어 자리를 잡고 살 수 있었는지 신기했다. 차에서 내려 단풍 구경을 했다. 은행나무인가 했더니, 아스펜 나무란다. 한국명으로는 사시나무, 사시나무 떨듯이 떤다는 말이 있듯이 파르르 떠는 것이 특징이란다. 노랗게 물든 잎사귀가 파르르 떠는 모습을 눈으로 보는데, 귀에서는 마치 여린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가 들리는 듯싶었다.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땅에 내려와 반짝인다면 저런 모습일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숨어있던 창조주의 손길을 마주친 것처럼 경외심이 들다가, 곧 푸짐한 종합선물세트를 받은 것처럼 마음이 포근해졌다. 이제 드디어 몸과 마음이 같은 박자로 가고 있음을 느낀다.

내게 10월은 겨울로 가는 길목으로 그저 바람 스산하게 불어 낙엽조차 거칠게 휘날리는 계절로 기억되었다. 그 무렵 떠난 친구의 기억으로 더욱 그랬다. 그러나, 이제는 10월의 어느 멋진 날, 산자락 소풍으로 아름다운 금빛 아스펜 나무의 기억이 자리잡을 것이다.

<송일란 (교회 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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