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창] 샌프란시스코에 내 마음을 두고 왔어요
2020-10-20 (화)
강영혜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임 회장)
추억은 낡고 오래된 것만도 아니고 그리움만도 아니다. 무의식 속의 과거와 지금의 현재로 공존하는 나의 삶이며 미래를 깨우치는 긍정적 에너지이다.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베이브릿지에 들어서니 일렁이는 물살이 세찬 바람에 회오리를 만들며 곧 다리를 덮칠 듯 넘실댔다. 차들은 천천히 주행하고 있었다. 다리 위에서 바라본 비 내리는 해안도시 풍경은 그림 같았다. 바다에는 화물선들이 부둣가에 정박돼 있고, 도시는 잿빛하늘 고층건물 사이로 12월의 휘황찬란한 불빛을 밝히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얼마 앞둔 시간이었다.
라디오에서 토니 베넷(Tony Bennett)의 ‘샌프란시스코에 내 마음을 두고 왔어요(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노래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50년 전 그날이 생각났다. 그 시절 청춘이었던 내가 미지의 샌프란시스코를 상상하며 들었던 그 곡이다. 라이언 오일과 알리 맥그로우가 열연한 ‘러브스토리(Love Story)’를 관람하고 극장을 나서니 광화문 사거리 밤하늘 아래로 하얀 눈발이 영화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소개팅서 처음 만난 파트너랑 집이 우연히 같은 방향이어서 눈구경도 할겸 같이 걸었다. 그는 자신이 토니 베넷의 팬이라며 이 노래를 몇 번이나 불렀다. 1시간도 넘게 걸어 집에 오니 밤 11시가 넘었다. 그러나 그날은 아버지가 대연각 호텔의 대화재 참사를 시청하시던 관계로 운좋게 위기를 면했다.
얼마 후 자정이 막 넘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그날 집까지 나를 바래다주던 그가 마지막 버스를 놓친 후 통금을 넘겨 방범대원에게 잡혔다. 친척집이 바로 코앞이라고 둘러댄 그를 순경이 우리집에 데리고 왔다. 나는 심장이 멎을 것 같아서 숨도 못쉬고 있는데 아버지는 의외로 그를 반기셨다. 겨울에 만난 그는 무슨 이유였는지 이듬해 봄, 꽃이 피기도 전에 헤어졌다. 그러나 나는 기억한다. 그가 눈 내리던 밤에 열심히 부르던 샌프란시스코의 노래를.
몇 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를 앞두고 비 오는 날 베이브릿지에서 바라본 샌프란시스코의 광경과 멋진 노래가 나의 아름다웠던 청춘시절을 소환시켰다. 세월은 무심히 흐르지만 추억은 지금도 가끔씩 낭만적인 모습으로 되살아나 나를 웃음짓게 한다. 참 좋았던 시절에 대한 감사와 나이 들어 추억을 꺼내보며 초콜릿 같은 달콤함을 느끼는 것은 작은 기쁨이다. 그때의 가슴 설렘으로 오늘, 또 내가 사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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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혜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임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