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창] 향기의 기억
2020-10-16 (금)
신정은 (SF한문협 회원)
‘문득 차를 끓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가을이 깊어간다는 뜻이다.’ 발효차를 조금 넣은 찻물에 정성스럽게 따서 말린 백매화를 띄우고 기다린다. 설백의 찻잔에서 살포시 흰꽃이 피어나고, 찻잔의 온기에 숨어 날듯 말듯 여리게 다가오는 유향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음을 움직이는 향기. 향기는 무엇인가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지나간 풍경을 복원하기도 하며, 보이지 않는 냄새로 세상을 연결한다.
언젠가 교보문고 앞을 지나다 스쳤던 디올의 향수에 걸음을 멈추고 전율을 느낀 적이 있었다. 같은 냄새가 거리를 에워쌌던 어느 해 파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향기는 곧바로, 조르주 무스타키와 소르본느 클뤼니 지하철역, 비오는 날 아침 코코아와 마리가 가지고 오던 갓 구운 바케트, 광동식 볶음밥에 계란탕을 팔던 몽빠르나스의 중국집과 그곳에서 마주쳤던 아몬드 모양의 눈을 한 빠리지엥까지 불러모으며, 어떤 시간과 공간이 결합된 생의 순간을 되살렸다.
향이 소환했던 기억, 인간에게 기억이란 무엇일까.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심문관이 지구로 잠입한 복제인간을 색출하는 방법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묻는 것이다. 외모나 행동은 인간과 똑같지만 기억이 이식된 복제인간이 어머니를 회상할 순 없다. 영화 메멘토 역시, 기억상실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기억은 자기 정체성의 바탕이 된다. 그리고 기억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밝히듯이, 회상(‘상기의 힘’)을 통해 시간의 파괴성을 극복하고, 잃어버린 정체성과 삶의 의미와 가치를 되찾게 한다.
최초의 냄새의 기억은 아버지의 서재였다. 책과 포마드향이 섞여 특유의 냄새가 났던 아버지의 서재는, 어린시절, 책을 보거나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공간이었고, 나와 세계를 연결하는 견고한 지반이었다. 이 깊은 광맥은 프루스트의 말처럼, 추억이라는 한묶음의 꽃다발로 되살아나길 기다리는 미완성의 시간이다. 요즘, 그 미완의 시간을 종종 들러 아버지의 체취를 채집한다. 서가에 꽂혀 있는 오래된 책들을 꺼내 기억의 꽃갈피를 꽂아 두기도 하고, 아이처럼 책상에 폴짝 걸터앉아 공기 속을 감돌고 있는 내게 특별한 향기를 맡기도 한다. 다가오는 기일을 두고 섬세하게 엮어나가는 이 심상의 타래는 고인이 되신 지나간 시간과 미래를 계획하고, 누적된 시간의 지층에서 발견하는 힘찬 감동이 된다.
<신정은 (SF한문협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