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창] 편지
2020-10-06 (화)
강영혜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임 회장)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에서 베트남전 파병병사에게 쓴 위문 편지가 내가 남자에게 처음 써 본 편지였는데, 그 군인 아저씨와 답장 편지를 주고받았다. 어느 해 여름 아저씨가 제대를 한 후 내 중학교 입학 선물로 만년필과 미제 초콜릿을 들고 우리집에 찾아왔다. 내가 편지에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데 선물을 보내려 해도 아저씨 주소를 몰라 보낼 수 없어 미안하다고 하자 군인 아저씨도 내 주소를 몰라 아무것도 못보낸다 하기에 선물 받을 마음에 철없이 우리집 주소를 주었던 것 같다. 복학을 앞둔 아저씨는 키도 큰 공학도였는데 아마도 그 당시 여대생이던 내 언니에게 관심을 갖고 왔던 것 같다.
대학시절엔 짝사랑중인 친한 친구 대신 내가 쓴 편지로 둘의 사랑이 맺어졌다. 싫다는데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남자친구로 힘든 시간을 보내던 또 다른 친구를 위해 써준 절교 편지로 둘은 쉽게 헤어졌다. 이렇게 즉방 효과가 나타나자 다른 친구들도 나를 찾아왔다.
편지 하나를 쓴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하고 함께 고민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정작 내 남자친구와의 트러블로 걱정이 쌓여 진심 담은 편지를 써서 보냈지만, 겨울바람보다 더 차가운 모습으로 남자친구는 떠나갔다. 역시 중이 제 머리 못 깎는가 보다.
가장 많이 써 본 편지로는 동부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딸에게 4년간 보낸 편지이다. 객지에서 어린 나이에 외로울까봐, 그리고 한글을 잊지 않게 해주기 위해 하루 걸러 길고 짧은 편지를 써 보냈다. 딸애는 가을이면 사상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지내던, 학교 운동장 옆 월든 폰드에서 내가 보내준 편지를 읽으며 마음을 달래고 예쁘게 물든 단풍잎을 주워 답장 편지 속에 넣어 보내주었다.
나는 아직도 손으로 편지를 써서 멀리 있는 친구에게 보내곤 한다. 자판을 두드리고 발송하는 메일이 아닌 종이 위에 나의 마음을 옮겨보는, 생명력있는 편지이다. 아무 때나 쓰고 싶을 때 펜을 꺼내어 백지에 써내려 가노라면 어느덧 나의 내면 세계와도 접할 수 있어 좋다. 산천은 제각기 색을 바꾸며 지나는 이 가을에 희미한 미래 앞에서 불안해 하는 나의 이웃들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손으로 써 보낸 편지가 조금이나마 받는 이에게 삶의 기쁨과 의욕을 불어넣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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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혜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임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