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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의 언어

2020-10-05 (월) 이은정 휴스턴대학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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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미국 대선 후보자 토론을 하던 밤, 나는 학생들이 써낸 최종 원고를 읽고 있었다. 현 대통령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말들과 상대방 말은 듣지 않고 몰아세우기만 하며 계속되는 공격적인 태도는 지난 4년간 수없이 보아온 것들과 유사했지만, 그 날은 유난히 더 폭력적으로 그리고 파괴적으로 느껴졌다. 학생들이 써내려간 아프고 독한 기억에 대해 깊이 성찰한 글을 읽으면서 본 탓일까?

나는 현재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치며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개개인의 경험과 그 경험에서 얻게 되는 지식은 우리가 배우는 대부분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나 역시도 대학원에서 공부한 응용 언어학의 대부분을 이민자로서 그리고 이중언어 구사자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해하고 또 접근한 적이 많았다. 예를 들어 학기 초부터 학생들과 함께 언어와 글쓰기에 대한 생각과 경험에 관해 같이 생각하고 토론하기도 하고, 비슷한 경험을 한 이중언어 또는 다언어 사용 작가의 글들을 읽고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기도 한다. 이런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성찰을 바탕으로 학생들은 리터러시 내러티브(literacy narrative)라는 짧은 에세이를 쓰며 그 단원을 마치게 된다. 그 날 내가 읽은 학생들의 글들은 이 리터러시 내러티브였다.

리터러시 내러티브를 가르치며 펜실베니아의 스테이트 칼리지, 캘리포니아의 몬터레이, 뉴욕의 퀸즈 그리고 지금 거주하고 있는 텍사스의 휴스턴까지 많은 다언어 사용 학생들을 만나왔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영어가 주요언어인 미국에서 자라온 그들에게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라는 질문에 나는 영광스럽게도 엄청난 세계를 엿보게 되었다. 이중언어 구사자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과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가 열어주는 세계에 대한 애착, 그리고 모국어에 대해 느끼는 애틋한 감정 등 학생들이 표현해내는 세계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넓고 깊었으며 복잡했다.


물론 이 질문이 항상 행복한 기억만 꺼내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나의 순진한 질문이 때로는 얼마나 힘들고, 아프고, 두려웠던 기억들을 꺼내게 만드는지 가까이서 보기도 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그것이 어떠한 차별과 편견을 불러일으켰는지, 또 이민자 가정에서 자라면서 얼마나 큰 고충이 되는지에 대해 종종 읽곤 한다. 어떤 학생은 자라면서 들었던 소위 말하는 ‘부서진’(broken) 영어에 대한 모독과 질책의 목소리, 어릴 때 영어로 인해 느꼈던 수치심과 좌절감이 대학생이 된 지금까지 생생하다는 학생들도 여럿이 있었다.

또 영어가 모국어 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피부색 때문에 종종 영어를 모를 것이라는 차별을 받는 기억을 털어놓기도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유색인종과 이민자에 대해 부정적이고 탄압적인 정치적 발언들 때문에 가족들이 모두 미국을 떠난 지금, 모국어는 쓸쓸하고 외롭다고 말하는 학생의 글도 읽었다. 그리고 티비에서는 트럼프가 백인우월주의자들을 그 이름으로 부르길 거부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무해하고 아무런 의도없이 한 질문이나 코멘트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들의 정체성이나 살아온 경험들에 대한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자기소개를 주고받으며 흔히 물어보는 “어디서 오셨어요?”(Where are you from?)라는 말이나 별뜻 없이 건넨, “영어 정말 잘하시네요”(Your English is really good)라는 칭찬으로 둔갑한 코멘트들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적인 상처가 되는 말이 될 수도 있다. 그 말의 뿌리에는 내가 지금 여기의 중심이고 당신의 자리와 언어는 우리가 기꺼이 빌려준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언행과 정책들이 가득한 나라에 살고 있는 지금, 우리는 매일 다른 이에게 내가 모르는 어떤 류의 폭력을 가하고 있을까? 그럴 때면 나를 비롯한 많은 이민자들과 다른 유색인종들의 매일을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그들의 매일에 어떻게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대화할 것인가 생각한다. 나의 학생들이 그 대안의 언어로 세상의 수많은 차별의 언어를 바꾸어 나가길 기대한다. 우리의 조그만 세상은 그렇게 조금씩 남들 몰래 바꾸어 가는 것이니까.

<이은정 휴스턴대학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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