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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교] 남자의 사랑

2020-09-25 (금) 부영무 (치과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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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상상을 하며 사는 존재이다. 꿈이라고도 말한다.

이 쪽과 저 쪽을 바꿔보는 장자의 나비의 꿈도 있지만, 대개는 한 쪽 안에서의 상상의 나래이다. 꿈도 세상 밖을 나가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이 세상에서 꿔보는 꿈 중에 상당히 많은 것이 ‘사랑의 꿈’이다.


본능적으로 사춘기에 찾아 드는 이성에 대한 맹목적인 호기심을 차제하고서라도, 이성의 냉철함 속에서도 싹트는 것이 사랑이고 그에 대한 각자의 환상을 피해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사랑의 영화’를 안 찍어 본 사람이 있을까?
어차피 인생은 상상이다.

상상한 만큼 이루어지고 그 쪽을 향한 쏜 화살이 되어 어느 마을의 나무둥걸에 박혀 있을 것이 아닌가? 젊은 날엔 상상을 하고 차비가 마련되면 떠나는 것이고, 늙은 날엔 상상했던 추억과 이뤄진 것들을 회상하는 재미로 산다.

사랑은 꿈이다. 꿈과 꿈이 만났을 때의 일체감이 드라마를 만든다.

삶에 스며있는 드라마의 향연들은 우리 인생을 맛깔 나게 한다.

어렸을 때 일찍 고향을 떠나 이른 자취생활을 하게 된 이유로 나에게는 부모의 울타리가 없었고,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하는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상상과 관찰의 영역이 발달됐던 것 같다. 만화는 동서고금을 오가는 상상력을 키워 주었고, 영화는 나의 비워진 감성의 창고를 채워주는 훌륭한 재료가 되었다. 각 시대마다 재료가 다르고 도구가 다르겠지만 나의 시대에는 그랬다. 만화와 영화이다. 그것으로 나를 채워 넣었다.

어렸을 적 숱하게 본 헐리우드 영화에는 많은 사랑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내가 남자라서 그런지 이상하게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남자의 사랑’ 모습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기병대’(Cavalry)의 존 웨인은 여인의 스카프를 벗겨 자기 목에 걸고 폭파시키는 다리를 건넜고 폭염의 연기 위로 그의 말발굽 소리만 남았다. ‘여로’(The Journey)의 율 브린너는그 까만 밤에 탈출하는 여자 부부를 찾아 포효를 했으나 끝내는 스스로 그들을 탈출시킨 후 본인은 저격 당해 죽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클라크 게이블은 자기에게 사랑의 마음을 열지 않는 이기적이고 당찬 남부 여인의 곁을 결국은 용납하지 못하고 떠나게 된다.


어찌 다 열거하랴만은 그들의 사랑은 말이 없고, 깊게 간직하며 자기를 포기하는 ‘징함’을 보인다. 그래서 더욱 애처롭고 아쉽고 오래 남는다. 사랑 앞에서의 여자는 용감하다. 때론 남자를 쟁취하거나 목숨을 살려 내기도 한다. 하지만 남자의 사랑은 말없이 깊게 오래 간다. 그리고 때로 가슴에 안고 떠나거나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다.
영원히 ‘버리지 않는’ 사랑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여자는 자기쟁취의 사랑이요, 남자는 자기 희생의 사랑이다. 사랑이란 만남과 맺어짐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순간부터 포기와 희생의 댓가가 뒤따른다.

여자에게 향기가 있듯이 남자에게도 나오는 향내가 있다. 성숙이라는 초가 쳐지면 더욱 향기롭다. 평생을 갈고 닦아 연륜과 함께 무르익은 장맛같이 나오는 향을 우리는 무심코 지나친다. 생각해 보면 우리 인생은 후회와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다. 그 아픔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성장한다. 즐거움과 행복의 마음은 그때그때 순간적인 흐름일 뿐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하루종일 먹이를 찾아 헤매야 하고 적을 만나는 순간 온몸의 털을 곤두 세워야 하며 손을 들고 다가오는 이름 모를 존재들에게도 주의를 게으르게 해서는 안된다. 그대로의 삶은 싸움과 같다. 평생의 공을 들인 것이 겨우 존재유지 뿐이라면 인생은 처참한 설국열차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신은 우리에게 여분의 것을 주었다. 바로 예술과 사랑이다.

칼 융(Carl S Jung)의 자서전을 보면, 그 복잡한 정신의학과 분석법도 나름 정리가 되는데 사랑이라는 묘약 앞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벅찬 힘과 가능성을 앞에 두고 어찌 감탄하지 않겠는가? 사랑만큼 힘과 향이 있는 약이 있을까? 그야말로 신이 준 선물이다.

사랑이란 정의가 따로 필요없는 단어이다. 그 무엇으로도 그 오묘함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일 그 단어를 사용하고 각개전투처럼 각자의 의미를 파고 들어가며 살고 있다.

여자의 사랑은 남자의 사랑으로 이루어 질 수 있다. 하지만 남자의 사랑은 여자의 사랑으로만 이루어 지긴 힘들다. 아주 자주 더 큰 사랑을 필요로 할 때가 많다.

여자는 남자를 통해 완성해야 할 것이 있고, 남자는 여자의 배를 타고 가야 할 곳이 있다. 동물적 생명력과 에너지는 여성이 타고 났고 삶의 다른 곳을 찾는 사명은 남성의 몫이다. 이런 자연스런 어우러짐이 사랑을 만드는 것이라면 사랑의 도식이 단순할 것이나, 훨씬 더 복잡한 공식이 난무하는 곳이 또한 사랑의 광장이다. 그래서 사랑은 평생 배워가는 것이다.

어느 날 사랑의 꿈에서 ‘사랑의 계시’로 넘어가는 길목을 맞게 되면 사랑에 이렇게 다양한 구분과 계제가 있음을 알고 놀라게 될 것이다. 계시의 사랑은 새로운 차원의 문(門)이 되며, 그러한 사랑은 개인을 구하고 나라를 구하며 영혼을 구한다.

일생을 통해 진하게 태운 인생향이 사랑의 냄새를 피워 올릴 수 있다면 더할 수 없이 이상적이다. 한마디로 인생 태어나서 사랑 하나만 배우고 간다 해도 남는 장사이다.

<부영무 (치과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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