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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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대추와 삼청동길

2020-09-25 (금) 신정은 (SF한문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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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뷰티플! 파랗게 고개를 내민 하늘이 반가워 한달음에 맞아 주었다. 오랜만에 보는 청명한 하늘과 재잘대는 새들의 지저귐이, 전장에서 돌아온 용사들의 승전가인 양 감격스럽다. 한동안 소식없던 허밍버드도 찾아와 재회의 정을 나눈다. 북새통 같던 날들을 뒤로 하며 품을 파고드는 선선한 공기와, 그새 엷어진 나무 그늘 속으로 성큼 들어선 가을의 정경.

올 가을은 공동체 단톡방에서부터 왔다. 매년 이맘 때면 한인농가에서 재배한 대추며, 감이며, 석류 등을 공동으로 구매하는데, 여름 내내 잦았던 산불로 잊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때 맞춰 몸집을 키우고 달콤한 과육을 채운 대추의 알림장은, 생명의 섭리와 가꾸고 기다린 농부의 애틋한 마음을 전하며 실팍한 햇대추를 가지고 왔다. 무자비한 폭염과 벼락과 산불 속에서도 제 안의 생명을 기르고 열매를 맺으니 그저 장하다. 지인이 알려준 대로 대추를 살짝 쪄서 널어두었더니, 조금씩 주름지며 결실과 조락의 계절을 물들이고 있다.

가을은 때로 오래 전 기억으로도 온다. 곱붉은 대추빛처럼 붉고 노란 느티나무의 단풍과 은행잎이 아름답던 1980년대 삼청동 길은, 가을이 되면 유독 생각나는 길이다. 한적한 경복궁 담길이나 현대화랑과 법련사, 앙드레 김 의상실을 지나는 발길은 늘 프랑스 문화원으로 향했다. 미술전시도 하던 1층 카페와 도서관, ‘르누아르의 방’으로 불리던 문화원 소극장은 그 당시 불문학도에게 귀한 문화적 통로였다. 한국을 갈 때마다 찾아가 보지만 상업시설로 달라진 거리에서, 그나마 연춘관 짜장면집이 남아 있다는 걸 고맙게 생각하며 돌아오곤 했다. 천천히 길을 걷노라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를 반복하며 구르몽의 ‘레 페이으 모르뜨’를 주고받던 그 길은, 이제 가슴에만 남아 있다.

본격적으로 가을이 시작된다는 추분도 지났다. 사시사철이 녹지인 베이지역에서 푸른 신록이 화려한 단풍으로 변하는 색의 도취는, 흔하지 않은 풍경일 게다. 그러기에 가을을 눈보다는 마음으로 보며 심취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폭염의 쓴맛과 산들바람의 단맛이 함께 익어가는 대추와 그 인고의 시간에 심취하고, 멀리 있어 아름다운 거리를 마음으로 더듬어 보면서 말이다. 가을이 익어간다. 홍엽 같은 대추도 기억 속의 삼청동 길도, 각각의 빛깔과 향기를 더하며 마음속으로 익어간다

<신정은 (SF한문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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