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다. 바뀌는 계절을 구름은 어떻게 알았는지 8월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끝없이 넓은 청명한 하늘에 한 조각의 하얀 솜을 얇게 펴서 살짝 얹어놓은 양, 구름은 하얀 드레스에 파란 액세서리를 한 천사의 모습이다.
산들산들 바람이 분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향하는 걸까.
오랜만에 CD를 듣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불안한 마음은 몇 달간 집에만 있어도 차분히 음악을 듣지 못하게 만든다. 감염의 두려움과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신으로 곧 나온다는 백신뉴스에도 믿음이 안간다.
일상의 부자유, 장기간에서의 고립감, 재정난, 가족갈등, 무기력 등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소중함을 잃게 만드는 우울증도 생기고 있다.
우리집 5살짜리 손녀는 스쿨버스 타고 유치원에 간다고 흥분되어 있다가 온라인으로 접하게 되니 실망과 혼돈속에 있다. 딸은 손녀가 친구들과의 만남이 제한되어 사회성과 정서발달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미리 고민하고 있다. 메아리없는 환호성만 들린다.
베토벤의 클라리넷 삼중주Op. 11이 흐르고 있다. ‘대중적인 곡(Gassenhauer)’이란 별칭을 가진 이 음악은 18세기에 분주했던 비엔나 시장 거리의 삼중주 곡으로 3악장으로 된 매우 아름다운 곡이다.
2악장 아다지오는 세 악기의 하모니가 서정적이고 장중해서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반면 3악장 알레그레토는 경쾌하고 생동감 넘치는 피아노 독주 그리고 이어지는 첼로와 클라리넷의 연주가 가슴을 뻥 뚫리게 한다.
요즈음 거칠고 불안했던 삶에서 오선지에 그려진 무생명이 악기의 연주를 통해 생명력이 솟아오르는 순간이다. 침체된 영혼이 소생하는 것 같다.
선율과 마음이 만나 위로를 건네고 불안감과 세상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다. 헤르만 헤세는 “모든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예술가에게 더없는 위안이 된다”라고 했다.
팬데믹을 통해 배운 교훈이 생겼다.
‘마음의 고통은 온전히 자신만의 능력으로 극복하면서 그 고통을 참기쁨으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쁨으로 인해 세상에는 고통만 존재 하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체험하고 의지가 생긴다’는 교훈이다.
우리 모두가 힘든 시기이다. 예술을 통하거나 가족간의 관계, 친구 등으로 소통을 해야 한다.
규칙적으로 일을 하고 운동이나 취미활동을 해서 스트레스를 풀고 마음이 부서진 자리에 사랑이 흐르도록 자신을 단련시키는 게 필요하다.
이 시기가 얼마나 지속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고난이라도 끝은 있게 마련이다. 항상 마음을 밝고 유쾌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요구되는 시기이다.
사람이 고통을 두려워하고 생명을 원하는 것처럼 말없는 생명체에게도 삶은 중요하다.
독일 쾰른의 한 농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농장의 젖소들은 한평생 축사에서 우유를 공급하는 일만 하였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우유를 생산 못하면 농장 주인은 사료와 유지비를 감당하지 못해 도축을 결정한다.
그런데 한 동물단체에서 이 소식을 듣고 후원을 받아서 넓은 초원에 소들을 풀어주어 자유를 누릴수 있게 해주었다.
태어나서 소들은 한번도 초원을 본 적이 없었는데 푸른 초원을 보자마자 왕방울만한 순한 눈을 껌뻑이며 뱃가죽이 다 쳐진 거대한 몸으로 펄쩍펄쩍 뛰고 풀밭에 머리를 비비기도 하고 흙내음도 맡으며 기뻐하고 행복해 하는 모습의 비디오를 보았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초원은 자기들이 지내야 할 곳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늘에 자유로이 떠도는 구름이 나의 마음을 아는 듯 빙긋이 웃고 있다. 자유로운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속삭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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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잔 / 워싱턴 두란노문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