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메리카여 영원하라’

2020-09-16 (수) 김용현 한민족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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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한국과 미국이 둘도 없는 절친한 사이이지만 처음 사귀는 일을 전쟁으로 시작했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19세기 중엽, 조선에서는 대원군의 쇄국정치가 한창이었고 미국은 남북전쟁을 끝마치고 나서 유럽 국가들과 경쟁하며 뒤늦게 아시아 진출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서구의 열강들이 아시아를 향해 접근해오는 길은 대부분 싸움을 걸어오는 수법이었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선원들이 행패를 부렸고 이에 조선 관민들의 저항으로 배는 전소되고 선원들 다수가 처형되었다. 미국은 싸움의 책임을 묻는다며 5년 뒤에 다시 강화도에 군함을 보내 침략을 감행했으며 이 일이 있고나서 1882년 청나라의 중재로 조선과 미국은 처음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했던 것이다.

아이들은 싸우면서 큰다고 했는데 국가의 유년기에 있었던 조선과 미국도 싸움을 통해 서로를 알게 되고 다른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때부터 두 나라는 남과 싸울 때는 늘 한편이 돼오곤 했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독립군이 연합군과 함께 항일 전선을 형성한 것을 시작으로 1950년 한국전쟁에서는 미국의 참전이 북한의 남침을 물리치는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소련과의 냉전체제 속에서 세계의 패권국으로 발돋움하려는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곳곳에서 전쟁을 일으키며 동맹 한국의 참전을 요구해왔다. 명분 없이 시작했던 베트남 전쟁이나 이라크 전쟁을 비롯해 최근의 호르무즈 해협 파병 요청과 미중 갈등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벌이는 분쟁이라면 한국은 자국의 이해를 따질 겨를 없이 미국 편에 동조할 수밖에 없게 되어있다.

그러던 중 코로나 팬데믹을 맞았다. 코로나 19는 인류에게 삶의 방식의 대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개인의 삶이나 국내정치에서도 그렇거니와 국제사회에서도 대결과 전쟁이 아니라 공존과 협력의 길로 가지 않고는 인류의 생존자체가 위태롭게 되었다. 따라서 안보의 개념도 국가의 안보보다는 국민의 건강과 복지를 보살피는 인간안보로 전환시켜야 되는 시대가 되었다. 미국은 ‘때리고 싶은 나라는 어떤 나라나 때린다’는 오래된 누명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한국을 도와준 나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한국과, 그리고 이 땅에 옮겨와 사는 우리 한인들이 미국을 도울 때가 되었다. 몇 차례의 전쟁터에서 같이 싸운 전우로서의 연대감과 함께, 상당수의 한인 유권자가 있으면서도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지구촌으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나라가 된 것에 대한 책임감도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11월3일 대선이 곧 다가온다. 투표권을 행사할 한인들은 미국 시민이면서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두 가지에 유념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누가 과연 미국을 변화시키며 자랑스러운 나라로 회복시켜줄 인물인지, 둘째는 누가 과연 한국을 호혜적인 동맹으로 대접하며 당장은 아니어도 한반도 평화에 진솔하게 접근해 줄 인물인지에 초점을 모아야할 것이다. 연방이나 로컬 의회 의원 선출에서도 동일한 관점을 적용하되 한인이라면 누구한테나 표를 던져 주던, 이민 초기 김창준 의원을 뽑던 시절과는 달라져야 한다.

미국의 국가(國歌)를 바꾸자는 여론이 있으나 지금의 가사도 많이 친숙해졌다. 특별히 “우리의 성조기는 영원히 휘날릴 것이다. 자유인의 땅, 용감한 사람들의 고향 위에서” 라는 구절이 마음에 든다. 우리가 사는 미국에서는 어서 인종갈등과 폭력이 사라지고, 떠나온 조국은 남남 간, 남북 간의 그 음습한 대립에서 떨치고 일어나 용맹스럽게 환희에 찬 미래로 나가게 되기 바란다.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는 영원하다. ‘아메리카여 영원하라, 코리아여 영원하라’

<김용현 한민족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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