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창] 울어버린 핼로윈
2020-09-15 (화)
강영혜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임 회장)
아직 9월인데 때이른 호박과 캔들로 장식된 샤핑몰 윈도우를 보니 그날이 생각난다. 이웃집에 사는 조니는 중국 여성으로 로펌에서 일하는 변호사였고, 조니의 남편인 스티브는 영국 사람으로 직업은 없으나 핸섬한 외모에 요트 한 척을 소유하고 다이빙을 즐기는 낙천주의자였다. 우리가 이사간 날 스티브는 축하의 꽃을 가져왔었다. 언젠가 우리집에 초대하자 스티브는 한 집 건너 오는데도 양복 상의를 입고 꽃다발을 들고 왔다. 나는 그가 영국 신사라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조니와 스티브가 초대한 핼로윈 파티에 난생 처음 커스튬을 골라 입고 갔다. 그날 초대된 사람들은 모두 먹고 마시며 신나게 춤을 추었고 스티브는 마이크를 잡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났다. 나는 조니에게 도와주겠다며 부엌에 가서 설거지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스티브가 내게 그릇 하나를 가리키며 그 속의 술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내가 버렸다고 하니 마구 화를 냈다. 허름한 그릇 속에 잎파리가 둥둥 떠 있던 것은 칵테일이었다. 그 술은 비싸고 특히 민트는 해프문베이에서 특정한 날에만 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손님이 왜 남의 것을 맘대로 버렸냐며 내 재산을 맘대로 없애도 되느냐고 했다. 조니는 안 보이고 사람들은 모두 구경만 하고 나는 혼자서 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 파티에 온 것을 후회했다. 살면서 남의 집 설거지해주다 봉변당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를 신사라고 후한 점수까지 주었으니... 갑자기 내 자신이 초라해져서 그만 울어버렸다.
내가 집에 갈 때 조니가 정리를 더 해야 한다며 잠든 아기 좀 우리집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을 했다. 당장 No 하고 싶었으나 그녀 잘못도 아니고 아기가 추울 것 같아 유모차를 밀고 왔다. 집에 와 생각하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먹다 남은 술도 재산이라고 난리인데 혹 아이라도 잘못 보면 마누라도 변호사인데 고소감 아닌가? 다음날 아침 드라이브웨이에서 스티브가 손을 흔든다. 아니 저 사람이 제정신인가? 설마 어제 저녁 내게 했던 일을 다 잊은 건 아니겠지...
오후에 조니가 찾아와서 남편 대신 내게 사과했다. 그날 저녁 스티브는 술로 인사불성이 되어 뒷정리를 혼자하며 그녀도 울었단다. 결국 핼로윈 파티가 두 여자를 울렸다. 하지만 아직도 찌그러진 그릇 속의 칵테일이 재산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강영혜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임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