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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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마음의 다리

2020-09-09 (수) 송일란 (교회 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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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봄날, 마루에 앉아 내다보던 앞마당에는 할머니가 심으셨다는 라일락이 흐드러지게 피고, 앵두나무 꽃이 가득했다. 유도화, 문주란, 장미... 그 추억들과 함께 가족들이 떠오른다. 추억과 함께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우리 마음이 이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부엌에서 내다보는 마당에는 무성히 자란 복숭아나무가 있다. 큰아이가 어느 해던가 마더스데이에 사 온 나무이다. 작은 묘목이었던 것이 저리 커져서 풍성한 열매를 주기도 했다. 딸아이한테 꽃바구니를 사 오라 했더니 예쁘다고 덥석 사 온 장미나무도 있다. 올해는 장미도 오랫동안 눈을 호강시켜 주며 피었다 졌다. 어느 날인가는 딸아이가 향기 좋다고 룰루랄라 들고 온 로즈메리도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막내아들 녀석이 요리하느라 심었다가 이제는 씨를 떨구고 있는 대파도 있다. 오늘은 둘째가 와서 마당에 앉아 간이 미용실을 차리고 머리 손질을 하고 있다. 미용실 원장은 바로 딸아이, 품삯은 포도주 한 병. 딸아이가 코로나 난리가 난 이후로 집안 식구 모두의 머리를 손질해 주고 있다.

딸아이는 이 시간이 힘들지 않은 눈치다. 오빠들과 이 얘기 저 얘기하면서 더 친해졌다고 큰오빠 머릿결은 이렇고, 작은오빠 머릿결은 저렇고 수다를 떤다. 맏이로 크느라 힘들었을 딸아이는 오빠들이 생겨서 조금 의지할 곳이 생긴 것 같아 마음이 좀 푸근해진다.

큰아이와 둘째아이는 남편의 아이들이다. 아이들끼리 잘 어울려 지내는 것이 고맙다. 어른 둘이야 좋아서 같이 살겠다고 나섰지만, 아이들은 느닷없이 같이 어울려 살게 된 건데 무슨 마음의 다리가 이어져 좋기만 했을까. 그런데도 잘 지내준 것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내가 할 일이라곤 좋아하는 음식을 같이 먹는 것밖에 없다. 어느 날은 오이를 상자로 사와, 오이소박이를 좋아하는 큰아이와 같이 김치를 담그고, 만두를 좋아하는 아이들을 위해 만두소를 만들어 같이 빚어 먹는다. 오늘은 채식주의자가 된 둘째가 좋아할 만한 나물 반찬이 몇 개 있어 맛있게 나눠 먹었다.
이 모든 사소한 것들이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추억이 되어 가고 있다. 추억을 만들어 간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다리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언젠가 아이들도 이 추억과 함께 우리 가족을 떠올리면 좋겠다.

<송일란 (교회 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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