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중년의 나이로 접어든 두 아들이 우리 곁을 떠나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부모가 되어 바쁘게들 살아가고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한가로움이 잦아드는 이즈음 세월이 등 떠미는 것도 아닌데 왠지 불쑥불쑥 이야기보따리를 자주 풀어보는 건, 노년이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외로움과 그리움의 자연스런 현상이 아닌가.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세월을 되돌려 아이들과 함께했던 즐거웠던 시절을 회상해 본다. 큰 아들의 초등학교 시절 애창하던 노래 한 곡이 생각난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서늘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한여름이면 동요를 부르던 그 당시 큰 아들 모습이 느닷없이 내 눈 앞에 아른거린다. 유독 땀이 많은 나에게 큰 아이는 집안일에 지친 나를 위한답시고, 두 손을 배에 모으고 목청껏 ‘산바람 강바람’을 불러댄다. 마치 산 위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이 금방이라도 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씻어주기라도 하듯 온몸 뼈 속까지 사뭇 시원해진다. 여름의 끝자락, 오늘 같은 무더운 날은 유달리 배려심이 깊은 아들을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입에 익숙한 바람의 노래를 혼자 흥얼거려본다.
바다 건너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큰 아들과는 달리, 얼마 전에는 집 가까이에 사는 작은 아들이 제식구들을 데리고 와서 한참을 놀다가 저녁 늦게야 돌아갔다. 전송을 하며 집안으로 들어오는데 이날따라 칠흑 같은 밤하늘에 크고 작은 별들이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유년시절 작은 아들은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황순원의 단편소설 ‘별’의 주제가 된 사춘기 소년의 성장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어쩌면 제 마음 속 깊이 감동을 주는 무언가를 발견한 듯한 목소리였다. 내용인즉 아름다운 모습으로 별이 된 어머니를 그리는 간절한 마음과 함께 현실 속의 못난 누이에 대한 미움까지도 그리움이란 상상력을 통해 ‘별’로 승화시킨 주인공의 모습에 무척이나 감동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처럼 예민한 사춘기 아이들의 감성에 불을 지피는 글들, 이를테면 나다니엘 호손의 ‘큰바위 얼굴’이나 알퐁스 도데의 양치기 소년 ‘별’, 그리고 “밤하늘의 가장 작은 별 하나가 내 옆에 내려와 잠들어 있노라”라는 소년의 순진한 연모의 정을 아름답게 묘사한 글귀 등 국어교과서에 실린 동화 같은 단편 소설을 배우고 오는 날이면 여느 때와 다르게 엄마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아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들들은 분명 마음 한켠에는 정서적인 기질이 따로 흐르고 있었나 보다. 한 번은 아들들에게 ‘큰 바위 얼굴’을 공부하고 온 날 그 소설 속의 의미가 무엇인지, 또 곁들여 장래의 희망이 무엇인지 은근히 물어 보았다. 그때는 뭐라고 애들이 대답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꿈이라기보다는 소박한 보통사람이 되는 것이 최고라고 말한 그들을 보며 오히려 엄마인 내가 실망한 것은 순전히 내 욕심 탓이었을까.
예나 지금이나 각박한 세상을 살다 보면 보통사람이 된다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깨달은 것도 아닌데 때 묻지 않은 순수한 감성은 타고난 품성인 것 같다.
어깨동무를 하고 활짝 웃으며 서 있는 벽에 걸린 두 아들의 어린 시절 사진을 바라보며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생각에 잠시 젖어본다. 흔히 사춘기 소년들이 겪는 마음의 성장통도 무난히 이겨내면서 평소 저희들의 바람처럼 순진하고 올곧은 바른생활의 사나이들로 자라 이제는 내 품에서 떠나갔지만, 언제까지나 아들들은 여리고 어린 아이들로 남아 오늘 내 마음 속에 아련한 그리움을 남긴다.
계절은 어김없이 긴긴 여름을 지나 가을을 예고하듯, 창 밖에는 목청껏 울어대던 매미소리도 점차 잦아들고, 갈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잎사귀들이 가벼운 바람결에 포물선을 그리며 소리 없이 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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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순 / 우드스톡,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