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에 있는 산을 자주 오른다. 그곳에는 목장이 몇 군데 있어서 한여름 빼고는 항상 소들이 나와 풀을 뜯고 있다. 한두 마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떼로 앉아 있어서 처음에는 무서워 멀리 돌아가기도 했다. 소똥은 또 어찌나 많은지, 내가 산림욕을 하는 건지 소똥 냄새 맡으러 온 건지 얼굴을 찡그리며 깡총발로 소똥을 뛰어넘어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마주 내려오던 아가씨가 앞쪽에 소(cow)가 무리 지어 있으니 조심하라며 지나쳐 내려갔다. 그 순간 내 뇌리를 강타한 건 무리 지어 있다는 소떼가 아니라, “cow”였다. 단 한 번도 그 단어를 떠올린 적이 없었다. 그때서야 내 머릿속엔 늘 “Beef”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맙소사! 심지어 블랙 앵거스를 떠올리기도 했다.
“워낭소리”라는 한국 영화가 있다. 칠십 넘은 할아버지와 마흔 살 된 소가 친구처럼 서로 의지하고 소통하며 같이 늙어가는 실제 이야기다. 평균 수명보다 한참을 더 산 소는 몸이 불편해도 할아버지 일이 있으면 가까스로 일어나 일을 하고, 할아버지는 소를 위해 풀밭에 농약을 치지 않는다. 귀가 어두운 할아버지는 소의 방울, 워낭소리는 금방 들으시고, 불편한 다리를 끌고 소 여물을 준비하신다. 할아버지에게 소는 친구이자, 동료이며, 자가용이기도 하다. 아, 나도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은 했었다. 소의 존재의 이유가 식용이 아닌 그렇게 사람과 서로 어우러져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소를 보며 설마 내 밥상 위의 소고기로 떠올릴 거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소의 트림, 방귀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 메탄가스가 지구온난화를 더 부추긴다고 한다. 그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고기를 덜 먹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건만, 그것은 그저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일 뿐이고, 현실은 슬프게도 기름기 자르르 부드러운 입맛을 기억하는 내 탐욕스러운 식탐에 지배를 받는다. 그러고도 등산길 막고 있는 소들을 타박했으니, 오로지 사람들의 식탁으로 가기 위해 사육당하고 있는 소들에게 미안했다.
그 이후에는 등산길에 만나는 소떼가 무섭지 않다. 오히려 눈망울 지그시 들여다보며 말을 건넨다. 엉덩이에 불로 지진 목장 표시의 낙인은 어린 송아지에게도 예외는 없는데, 그 상처를 보면서도 말을 건넨다.
“미안해. 우리가 잘못해서 그런 거야.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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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일란 (교회 사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