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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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팬데믹 에피소드

2020-08-25 (화) 강영혜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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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안 오는 날이 있다. 시간은 새벽 2시. 거울 속의 나를 보니 한동안 칩거하느라 손질 못한 머리가 엉망이다. 얼마 전 구비한 남편 이발기로 머리를 손보려 스위치를 켠 순간 왼쪽 머리카락이 한 뭉치 잘려져 나갔다. 오른쪽까지 자를 자신이 없어 그냥 두었다. 게다가 얼굴 또한 말이 아니다 싶어 마사지 팩을 찾아 얼굴에 얹고 창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자판 위로 어스름한 불빛만 살짝 들락거리는 밤이다. 팩을 떼어내려고 걸어가는데 남편이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이불을 뒤집어쓴다. 잠결에 나를 하얀 복면 쓴 강도로 착각한 것이다. 한밤중에 왜 놀라게 하냐며 우리는 심야에 티격태격했다.

갑자기 옛일이 생각났다. 남편과 외출 후 늦게 집에 돌아와 문을 여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이때 남편은 한발 물러서며 나더러 먼저 들어가라고 유사시엔 본인이 뒤에서 전면전을 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남편과 한참 실랑이하다 아파트에 들어가니 도둑이 떠났는지 아무도 없었다. 새댁이던 나는 그날 너무 화가 나서 헤어지자는 말까지 했다.

한번은 남편이 양식집으로 외식을 나가자 했는데 나는 칼국수가 먹고 싶었다. 결혼 전 내가 다니던 외국 회사가 명동 1번지에 있었는데, 명동칼국수집이 지척에 있어 친구들과 자주 먹으러 가곤 했다. 칼국수를 시켜서 먹는 중에 남편이 먼저 나가서 기다리겠다고 자리를 떴다. 알고 보니 내가 칼국수를 먹으며 종업원에게 김치를 더 달라고 간절히 애원을 했고 모두들 땀을 흘리며 먹는 모습이 마치 사우나탕을 연상시켰다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당시 매너맨으로 불리던 남편은 양식집에서 설익은 스테이크 시키기를 즐겨했으며 내가 완전히 익힌 웰던을 시키려 하면 촌스럽다는 듯 미디엄으로 슬며시 주문하여 반도 못먹게 만들곤 했다. 디즈니랜드에선 360도 회전하는 놀이기구 풍선을 타봐야 한다는 남편의 주장을 따랐다가 완전 초죽음이 된 아이들이 울고 말았다.

남편 때문에 사는 게 복잡해지고 나는 변해야 했다. 집안에 못박는 일, 지붕에 사다리 놓고 낙엽 치우는 일, 어느새 나는 발전을 거듭하여 내 집의 휴즈도 갈아끼울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자기중심적인 남편과 부딪치며 살아온 지 40년이다. 시간이 흘러도 사람의 습성이란 참으로 변하기 힘든 건가 보다. 지금도 내가 본인을 놀라게 했다고 자기주장만 하고 있지 않는가? 그냥 누워 있을걸...오늘은 모든 것이 낭패다.

<강영혜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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