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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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붓글씨 단상

2020-08-24 (월) 조태자 / 메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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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께서 붓글씨를 쓰시기 전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은 먹을 가는 일이었다. 서양에 잉크가 있다면 동양에는 먹이 있지 않을까? 먹으로 쓴 붓글씨는 수백년이 지나도 색깔이 변치 않고 모양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붓과 먹, 한지, 한자는 모두 고대 중국의 발명품들이다.

할아버지의 서예를 보면서 지금까지 늘 안타깝고 후회스럽고 무지스러운 기분이 드는 것은 도무지 무슨 내용의 한자인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몰랐고 그리고 단 한자도 읽을 수 없는 글씨체였다. 할아버지의 글씨체는 물결이 흐르는 듯 부드러운 곡선으로 쓰여졌으며 기존의 경직된 한자하고는 달랐다. 한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우리세대는 읽고, 쓰고, 이해하기에는 여러가지로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고향을 떠나 미국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데 시아버님께서 한국의 유명 서예가의 여덟 폭짜리 병풍을 선물로 가지고 오셨다. 병풍을 열어 보았을 때 같은 한자인데도 할아버지의 것과는 너무나 다른 글씨체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한자 서체가 여러 종류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다를 수가….


유명 서예가의 글씨체는 단아하고 독립적이고 글씨체가 굵었다. 좀더 현대적으로 보이는 이 병풍의 한자들은 반 정도는 읽을 수가 있었지만 그래도 뜻을 헤아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아버님께서 한국으로 돌아가시기 전 그 병풍의 한자를 다 읽어주시고 설명해주시면서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독려해주셨다.

한자 학원을 오래 다닌 지인의 얘기를 들어보면 한자는 그 뜻이 오묘하고 철학적이고 신비한 문자라고 한다. 요즈음 젊은이들도 한자를 배우려는 이가 적지 않은 것이 그 때문일까.

<조태자 / 메릴랜드>

<조태자 / 메릴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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