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창] 책임감이 +1 상승하였습니다
2020-08-17 (월)
한연선 (더밀크 리서처)
마음이 닮은 친구들을 만났다. 반가운 인사를 건네고 서로 지난날들을 나누다 보면 납작하게 눌렸던 마음이 금새 후룩 펴진다. 먼지가 쌓이고 시달렸던 마음에 온기가 돌고 말랑말랑한 웃음도 오른다. 각자의 이야기가 시작되면 모두 눈앞에 펼쳐진 보석을 고르듯 심혈을 기울여 듣는다. 온 세상 사람들이 재택근무를 하는 중에 출근하는 친구 이야기를 듣자니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을 보는 것 같다. 워라밸을 주장하며 퇴근해 버린 부하직원 뒷치닥거리에 퇴근이 늦어지는 친구의 처지가 부당하고 안쓰럽다. 전업 주부인 친구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그녀의 잘 손질된 집과 뛰어난 손맛은 친구들 사이에서는 늘 칭찬감인데 그 집 식구들은 맵네 짜네 불평을 한단다. 친구가 맘 상할까 싶어 흉은 조금만 본다. 나는 이방인으로서 사는 삶의 각박함을 토로한다. 친구들은 사정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무조건 내 편이 되어 격하게 나를 위로한다.
그러다 우리는 문득 깨달았다. 우리 삶이 어디에쯤 와 있는지 확인한 것이다. 가족이니 공동체니 다 모르겠고 그저 제 선택만 중요한 다음 세대가 못마땅하다면 그건 기성세대가 되었다는 증거다. 다른 어떤 이유보다 책임감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그 또한 기성세대란 뜻이다. 어릴 때는 이해할 수 없던 그들의 자리에 우리가 있다. 이상과 현실의 갭을 온몸으로 메꾸는 세대, 이해받기보다는 책임지는데 익숙한 세대. 생각해 보면, 독재정권이나 부패비리를 제외한다면 일반 기성세대들이 비판에 무뎠던 이유가 조금은 짐작이 된다. 그들은 일일이 대꾸할 여력이 없고 바쁘고 피곤하다. 꼭 관성과 구습에 의한 결과라기보다는 자신의 자리에서 버티기에도 벅찼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모두 삶의 어떤 시점에 그 자리에 선다. 개인의 잘남이나 못남과 상관없이, X세대든, Z세대든, 밀레니얼 세대든 상관없이, 삶의 모양과 색깔이 어떻든지도 상관없다. 순서가 되면 감당해야 하는 삶의 자리. 누구에겐 그 몫이 조금 가볍고 누구에겐 더 무겁겠지.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면 시간의 열매들을 보게 될 것이다. 조급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부족한 것은 언제나 있는 법이니 지금이라도 부지런히 채워가면 된다. 그도 아니면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다. 자신에게 하고픈 말을 서로에게 읊어주며 용기를 낸다. 삶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이렇듯 불쑥 건넨다.
<한연선 (더밀크 리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