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금문교] 빈민의 의사 ‘갈렌’

2020-08-14 (금) 제이슨 최 (수필가)
크게 작게
의사란 치료와 이념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중국 무협지에는 부모님이나 스승을 살해한 원수를 갚기 위해 평생 칼을 갈고 무술을 연마하여 원수를 찾아다니는 무시무시한 정의의 무사가 종종 등장한다. 결국 그는 통쾌하게 원수를 처단하고 복수의 칼을 거두는 것으로 끝난다. 만약 주인공의 직업이 의사이고, 그 원수가 생명이 위태로운 정도의 상처를 입고 제 발로 병원을 찾아 왔다면 의사는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의 ‘하얀 역병’을 읽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빈민의 의사 ‘갈렌’을 생각해 본다.

어느 날 나라 안에 문둥병이 발생한다. 피부에 하얀 반점이 생겼다가 대리석처럼 단단해지는 병이다. 다음엔 그 부분이 썩어 문드러지며 심한 악취를 풍기다가 패혈증으로 사망하게 되는데 의사들은 이를 ‘베이징 나병’ ‘백색 바이러스’ ‘쳉 바이러스’등으로 불렀지만 도무지 치료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고도의 전염성을 가졌고 오직 45세 이상의 성인들만 감염이 된다는 특징이 있었다. 3년이 채 되기도 전에 2천만명의 환자가 발생할 만큼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전국에서 가장 크고 이름난 의사들이 많은 유명 대학병원에는 ‘시겔리우스’라는 의사가 있었는데 의료진을 대표하여 기자회견을 하지만 치료방법이 없으므로 체념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때 의사 갈렌이 나선다. 갈렌은 특효 처방을 알고 있으나 자신이 요구하는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환자는 치료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그가 제시한 조건이란 오직 돈이 없는 가난한 환자들만 치료하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갈렌은 가난한 환자들만 수용하는 제 13병동의 환자들을 완치시킴으로서 그의 특효 처방이 사실임을 증명해 보였다.


시겔리우스 교수는 갈렌의 특효 처방법은 자신과 대학병원 전체의 공이라면서 치료법을 공개하라고 압력을 가하지만 갈렌은 강력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 빈민의 의사 갈렌이 전 세계의 정부들과 왕과 통치자들에게 말합니다. 어떤 이유로든 전쟁은 원치 않는다는 것을 공표하는 바입니다.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하얀 역병에 의해 지구상의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약속하기 전에는 절대로 나의 치료 방법을 공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총사령관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를 돕는 핵심 참모 크루그 남작의 어깨에도 하얀 반점이 발생한다. 크루그 남작은 역병의 공포에 떨며 갈렌을 찾아간다. 갈렌은 크루그를 알아 보았으나 오직 가난한 사람만 치료해 주겠다고 한 자신의 소신을 지키느라 치료를 거절한다. 크루그 남작은 엄청난 액수를 제시하며 치료를 부탁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갈렌은 크루그에게 내가 당신을 치료해 주는 조건은 돈이 아니라 당장 전쟁을 끝내고 평화협상을 체결하는 것뿐이라고 말해 준다. 크루그는 하는 수 없이 총사령관에게 가서 자신의 병을 치료하여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는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추구하는 길 밖에 없다고 사정해 보았으나 총사령관은 크루그의 제의를 들어 주지 않았다. 총사령관은 치료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갈렌을 잡아다가 고문이라도 하려했으나 크루그 남작은 고통을 견디지 못해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크루그 남작이 죽은 후, 전쟁은 승리의 깃발을 드높이고 있었으나 총사령관의 가슴엔 하얀 반점이 돋고 있었다. 이제 그의 생명도 고작 6주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갈렌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갈렌은 전쟁을 멈춘다면 치료해 주겠노라고 말한다. 전쟁보다는 자신의 생명이 더 소중함을 깨달은 총사령관은 갈렌의 말을 따르겠다고 약속한다. 갈렌은 왕진 가방을 들고 총사령관 집으로 향한다. 거리엔 흥분한 군중들이 전쟁을 찬양하며 총사령관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환호하고 있었다. 갈렌이 전쟁은 안된다고 만류하며 군중들 사이를 지나가려하자 군중들은 의사 갈렌을 짓밟아버리고 행군을 계속했다. 쓰러진 갈렌 곁에 뒹구는 왕진 가방을 보고 어느 군중이 외쳤다. ‘어머나, 의사가 죽었네...’ 그리고 막이 내린다.

갈렌이 군중에 짓밟혀 죽어버렸기 때문에 하얀 역병은 치료법이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고,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무서운 전염병은 지금도 여전히 전파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총사령관이 역병에 걸려 죽음으로서 전쟁은 끝났을 것이라는 점이다. 작가 차페크가 이 작품을 발표한 1937년은 나치 독일이 2차대전을 일으킬 무렵이었기 때문에 총사령관은 아마도 히틀러가 아닌가 싶다. 히틀러가 이름 모를 역병에 걸려 갈렌같은 의사의 도움을 필요로 했을 때, 갈렌이 전쟁을 그만두면 고쳐주겠다고 히틀러를 설득했다면 2차대전으로해서 희생된 수많은 생명들을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작품에서 갈렌은 빈민의 의사를 자처하고 지구상의 전쟁을 막아보려 안간힘을 쏟지만 현실 속에서 과연 가능한 일인지는 알 수가 없다. 차페크라는 작가는 독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남겼지만 지금도 지구상에는 종교 때문에, 인종간 갈등 때문에, 집단 이기주의 때문에... 크고 작은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어디 갈렌 같은 의사 없을까?

<제이슨 최 (수필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