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바늘과 실

2020-08-08 (토) 김홍식 내과의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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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은 느낌표(!) 같다.” 수필계의 거목이시며 스승이신 정목일 선생님의 ‘바늘’ 수필에 나오는 글이다. 더 인용하면 “바늘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몸에는 귀 하나 뿐이다. 옛 어머니들은 바늘귀로 세상을 보며 한 평생을 보냈다. 바늘귀로 세상 보는 법을 터득했다... 바늘은 날카롭고 뾰쪽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다... 바늘은 덕이 높다. 찢어지고 갈라진 옷을 기워서 편안하게 해 준다... 바늘은 의술의 도구이기도 하다. 바늘이 없다면 의사들은 어떻게 수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치유하게 하는 자비를 지녔다... 바늘은 군더더기가 없다. 단순하고 첨예하다... 치유와 희생의 상징이며, 미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어떻게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섬세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을까. 귀 하나를 가지고 어떻게 세상을 밝게 의미 있게 볼 수 있을까... 바늘은 큰 느낌표(!)이다.”

외과 의사들의 바늘을 보며 또 간단한 상처를 직접 꿰매면서, 바늘을 바라보신 정목일 선생님의 안목과 사색에 감탄하게 된다. 요즘은 상처를 바늘로 꿰매지 않고 스테이플로 박아버리거나 살을 풀 접착제로 붙이는 방법이 개발되기도 했지만 아직도 바늘로 상처를 꿰매는 것이 보편적이다. 풀 접착제는 주위에 힘이 많이 가해지는 부위에는 쓸 수 없다.

고대에 동물 가죽을 긴 바늘 같은 도구로 붙잡아 매던 것을 의술에서 사람의 상처를 꿰매는데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바늘 모양도 긴 일자형 외에 반달형이 개발되기도 하였다. 반달형도 사용하려는 용도에 따라 휘어짐의 각도가 다른 여러 종류가 만들어졌다.


의료용 바늘은 귀가 크면 피부를 통과하기 어렵기 때문에 귀가 바늘의 두께보다 넓지 않게 날씬하게 만들어져 있고 실이 미리 바늘 끝에 부착되어 만들어져 어머님들이 어려워하시던 실 끝을 바늘귀 속으로 밀어넣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의료용은 끝에서부터 잘라가면서 사용하면 같은 바늘과 실로 반복 사용할 수 있다.

서양의술 뿐 아니라 한방에서도 침술을 시술하는데 각종 바늘이 사용되었으니 굵기와 길이가 다양하다. 위장이 안 좋을 때 부모님들이 손가락을 따주시던 도구였던 바늘, 즉각적인 증상의 호전으로 바늘의 따끔함이 오히려 따뜻한 도움으로 기억된다.

바늘의 따뜻한 추억은 겨울에도 있다. 따뜻한 난로 옆에서 뜨개질을 하시던 어머님의 모습이다. 긴 대나무로 만든 대바늘과 끝이 코처럼 생긴 코바늘을 서로 맞대어가며 실타래에서 나오는 실을 엮어가시던 바쁜 손놀림이 떠오른다. 실이 바늘귀에 꿰어있지도 않았었는데 어떻게 예쁜 장갑이 되고 목도리가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매 겨울이면 다른 스웨터를 만들어 주셨는데 털실은 늘 입던 스웨터를 풀어서 김이 나오는 주전자를 통과시켜 다시 편 재활용 털실이었다. 그 놈의 실은 잘 떨어지지도 않았고 어머님의 바늘이 지나가기만 하면 다른 옷으로 태어났다.

바늘은 참 단순하면서도 “창조적인 큰 느낌표”라 칭찬받아도 손색이 없다 치더라도 과연 바늘만 있었다면 좋은 결과가 있었을까? 늘 당연하게 여겼던 바늘 뒤를 따라다니며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실의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 실이 없었다면 과연 바늘이 위대하게 되었을까.

상처를 봉합하는 실의 종류는 녹는 실과 녹지 않는 실로 나누는데, 녹지 않는 실의 대표적인 것으로 나일론과 실크가 있고 상처가 적게 남는 나일론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녹는 실은 조직에 흡수되어 나중에 없어져야 되는 부분에 사용된다. 뱃속을 봉합할 때, 근육이나 피하 층을 봉합할 때는 피부 밖에서 실밥을 뺄 수가 없으므로 녹아 흡수되는 실을 사용하는데,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걸려야 흡수되어 사라진다. 녹는 실은 바깥 피부를 봉합할 때는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앞에서 움직이는 바늘을 늘 치켜세웠지만 그 뒤를 조용히 따라가는 실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었다. ‘실’은 늘 그 자리에 있어야하는 당연한 존재로만 알았었다. 그러나 찢어져있는 부분을 다 나을 때까지 묵묵히 붙잡고 있는 몫은 실이었다. 바늘은 칭찬을 받고 한번 지나가면서 할 일을 마쳤지만 끝까지 남아서 상처가 나을 때까지 녹아지거나 후에 잘려서 없어지기 위해 자리를 지키는 존재는 ‘실’이었다.

평온한 시절에는 옆에 있어 수고해주어도 그저 그런 것으로 여겼고, 보고 싶을 때 언제나 볼 수 있었기에 소중한 줄 몰랐던 존재들이 감사하고 그리워진다. 당연한 것이 절절하고 간절해진 시절이 되고 보니 지금까지 지내왔던 시간들이 은혜의 실로 꿰어졌던 연속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받은 사랑을 필요한 이들에게 당연히 돌려주어야 할 시간이다. 그 것은 힘든 희생이 아니라 내면에서 자연적으로 솟아나는 기쁨이다.

<김홍식 내과의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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