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창]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하루

2020-08-04 (화) 12:00:00 강영혜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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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손녀 손목을 잡고 길을 가다가 동네 어귀에서 잠시 쉬어가려고 걸터앉았다. 7월의 하늘은 푸르다 못해 눈이 시리도록 파랗고 길에는 꽃들이 앞다투어 피어 무성하다. 아이는 돌짝 사이를 비집고 나와서 피어있는, 코스모스보다 훨씬 작고 가느다란 연보라색 야생화를 꺾어 한줌 가져와 내 손에 쥐어준다.

아 그때도 7월이었나 보다. 3년 전 1살을 갓넘긴 손녀를 유모차에 태워 도서관에 가던 날 태양은 작열했고 온동네가 꽃으로 만발했던 여름이었다. 갓길에 앙증맞게 피어난 작디작은 하얀 꽃이 하필 내 눈에 들어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던가. 나는 곧 그 꽃들을 따서 하나씩 아이의 머리에 꽂아주었다. 화관을 쓴 아이는 곧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잠이 들었다. 벌과 나비가 나풀거리던 정오의 한가로운 시간이였다.

얼마 후 도서관에 가니 아이가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무슨 음식을 잘못 주었나 싶었는데 아이의 입에 잔뜩 머금은 꽃들이 보였다. 내가 유모차를 밀고가는 동안 잠에서 깨어 머리에 꽂힌 꽃들을 먹은 것이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초죽음이 되어 발을 땅에서 뗄 수가 없었다. 꽃도 문제지만 며칠 전 나무에 누에를 없앤다고 시에서 약을 살포한 것이 기억나서였다. 옆에 있던 분이 포이즌센터에 바로 연락을 한 후 날 바꿔주었다. 내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한 시간 정도 상태를 지켜보고 이상하면 병원에 데려가라 했다. 전화를 끊으려는데 아이 부모의 연락처를 물었다. 내키지 않았으나 보고서에 쓰는 형식이려니 하고 전화번호를 주었다. 다행히 아이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부터의 걱정은 이 일을 딸에게 솔직히 얘기하느냐 마느냐였다. 두 마음이 오가던 중 아이가 정상인데 굳이 얘기할 필요가 있겠나 하는 마음이 앞서고 있었다. 한동안 놀다가 집에 돌아왔다. 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문 앞에 생면부지의 어떤 여인이 성큼 다가오며 왜 알리지 않았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다리가 후들거렸고 손녀 돌보던 것을 후회했다. 삶이 무기력하게도 느껴졌다.

백번 잘해도 한번 실수하면 모든 공이 날아가 버려 말짱 도루묵 되는 것이 아이 돌보기이다. 그날 나는 포이즌센터가 아이 부모에게 확인차 걸어준 전화 한통에 그만 신용불량자로 전락하고 내 가슴엔 주홍글씨가 새겨졌다. 그러나 모든 걸 다 잊은 듯 오늘도 나는 손녀 주려고 또 하나의 어여쁜 화관을 만들고 있다.

<강영혜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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