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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교] 하코네의 바람

2020-07-24 (금) 부영무 (치과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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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지형이 주는 기운을 몸으로 느낄 때가 있다.

인간끼리의 기운이야 훨씬 더 가깝게 매일 접하며 살고 있지만, 천지기운을 느껴 보려면 상당히 마음이 고요해 있어야 한다.

또, 늘상 살아 온 지역에서는 익숙 해서인지 이를 감지하지 못하고 그냥 바삐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지난 해 여름의 끝 무렵에 벼르던 일본 여행을 가게 되었다. 아들과의 두 남자 여행이라 더 의미가 깊었다. 첫 일본 여행이라 동경에서 가까운 하코네 온천장을 목표로 삼았다. 일본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지만 사실 어딘가 미지의 곳에 우리 자신을 따로 던져 넣고 싶었던 거였다. 서울 김포에서 하네다 공항, 그리고 시나가와역에 있는 프린스 호텔로의 첫날 노선은 무리없이 끝냈다. 다음 날 하코네까지도 지역 안내인들의 친절로 차질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일부러 시내를 피해 작은 전차를 타고 30분 정도를 더 산 위로 올라가는 곳에 있는 ‘Forest Gora’ 라는 산간 마을의 온천장을 예약해 두었었다.

도착한 날은 비가 간간이 뿌리며 흐릿한 날씨가 구릉의 능선과 함께 어우러지는 그야말로 내가 좋아하는 비 오는 오후였다. 여장을 풀고 예약된 시간에 맞춰 우리만의 온천욕을 즐기고 방에 돌아와 창 밖의 그 산간 고원의 풍광이 빗속에 잠기는 모습을 계속 즐겼다. 잠시나마 나를 잊을 수 있었고 보호받는 아이의 심정으로 돌아가 자연에 안기는 품세를 취했다. 나는 내가 만든 ‘나’에게서 벗어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날 저녁, 아랫층 식당부에서 일본식 ‘저녁 풀 코스’를 대접 받았다. 솔직히 일본요리에 그런 코스가 있는 지도 몰랐었다. 손님에게 방해되지 않게 적당히 먼 거리에서 꾸준히 다음 요리를 내오고 서브를 하고 물러서 있는 그들이 고맙고 기특했다. 요리는 충분히 일본의 모습과 로칼의 특성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작품이었고 간결한 세팅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 사진들을 가끔 들여다 보며 흐뭇해 한다.

저녁 식사후, 방으로 돌아와 각자의 시간을 가진 후 어둠과 함께 잠을 청한 나는 그후 잠을 들 수가 없었다. 아들의 코고는 소리보다 창 밖의 비바람 소리가 훨씬 더 크게 들린 날이었다. 웬 회오리 바람이 그렇게 휘몰아 치는지 떨어지는 나뭇잎과 함께 장엄한 음악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처음 몇 번은 회오리 바람과 나뭇잎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손님인 나를 부르는가 싶어 일어났고, 나중엔 사이 사이 고요한 정적에 놀라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돌아보니 이것은 나를 깨우려는 게 아니고 제 한풀이 였다. 정확하게 7~8분마다 몰아치는 회오리 바람은 그 1~2분 후의 적막한 고요의 예고편 이었음을 나는 파악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고원 계곡의 그날 밤 자연의 ‘Pattern’ 이었다. 그 적막과 회오리의 반복은 온 밤을 다해 지속됐다. 나는 이날 하코네의 바람을 보고 심히 느낀 것이 있었다.

좋아하는 비오는 밤이어서도 그랬겠지만 그 엄숙하고 정확한 자연의 ‘터뜨림’ 앞에서 어떤 메시지를 받은 것이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때가 되면 기어히‘Execute’ 하고야 마는 섭리나 명령같은 것이었다. 결국, 바람을 불게 해서 천지를 다시 평온시키고 또 다시 계곡에 압력이 차면 정확하게 또 터뜨릴 것이었다.

이 현상을 나는 ‘Venting’ 이라고 스스로 명명하였다.

때가 되면 쌓인 것을 터뜨리는 저 단순하면서도 장엄한 자연의 법칙 앞에서 나는 어떤 ‘행동의 당위성’을 보았다. 자주 움츠러들고 자주 겁을 내며 세상 뒤에 숨기를 선호하며 때가 되도 제대로 터뜨리지 못하고 사는 옹졸한 자신이 상대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내가 하지 못하면 결국 하늘이 하겠구나, 아니 조용하게 기류를 쌓고 있는 것이 한번의 터뜨림을 위해서가 아닌가? 도대체 나는 무엇을 무서워 하여 행동없이 한 인생을 살았단 말인가? 이런 자괴감도 따랐다.


생각해 보면 이 Venting 이 적용되는 곳이 아주 많다.

자연도 이렇게 들이 마시고 내뱉는 호흡을 하는데, 사람의 생명을 가르는 호흡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넣고 빼는 것은 몸의 Circulation 의 기본이요, 사기가 쌓인 곳은 뚫거나 돌려 주어야 산다. 기운이 균형을 못 가지면 몸이 비뚤어지고 장기가 산만해 진다. 사람의 신체이건 사회의 구조이건 움직여 돌아가게 해야 한다. 정체된 모든 것은 Venting 이 필요하고 그것이 가장 신속하고 확실한 자정작용이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릇에 따라 넣어지고 때가 되면 놓아 지는 것이니 그 Pattern 과 운율을 자각하면 자연 만큼 정확하진 않더라도 운용과 행동의 묘가 터득되리라 믿어진다. 철학에 있어서도 정신적 충격요법은 삶을 변화시키고 질을 쇄신 시킨다.

가슴을 치는 한마디의 말이 인생 몇십년의 좌우명이 되어 고난을 이겨 나가는 근간이 될 수도 있고,한번의 향기가 그 여인을 평생 잊지 못하게 하는 마법이 되는 것도 정신의 Venting 이라 할 수 있겠다.

하코네 그 밤의 엄숙한 비바람은 나에게 내 정신 속으로 들어온 바람이었다. 나에게 그 여행은 다른 차원으로의 공간이동이었고 나를 내 Ego에서 떼어 놓아 다른 그릇에 넣어보는 시도가 되었다. 바로 나 스스로가 바람이 되어보는 작업이 된 것이다.

<부영무 (치과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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