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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대체 왜 그래?

2020-07-23 (목) 이현주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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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년 가량, 학교를 휴학하고 출판사에서 일한 적이 있다. 어린이 교양서적을 만드는 팀에 속해 있었는데, 나의 주된 업무는 챕터마다 학습을 돕기 위한 퍼즐이나 짤막한 꽁트를 만들어 재미를 유발하는 것이었다. 그다지 재미있지 않아도 괜찮았다. 아무리 대충 만들어 팀장님께 가져가더라도 ‘이만하면 됐다’는 말을 듣는, 그야말로 조금도 중요하지 않고 맥빠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날림으로 분량을 채우고 퇴근 시간을 기다리며 놀기 일쑤였다.

그리 크지 않은 사무실이라서, 커피를 타 마시는 척 어슬렁거리며 사람들의 모니터를 힐끔거리면 온갖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 팀의 팀장님과 과장님은 늘 이력서를 쓰고 계셨다. 매일 이직을 꿈꾸고 있었으리라. 영업 팀의 팀장님은 만화를 보시고, 여행 서적 팀의 대리님은 게임을 하셨다. 하지만 아주 방심해서는 안 됐다. 가끔 사장실에서 사장이 나와 돌아다니며 우리를 감시했기 때문이다. 때로 사장은 우리 중 누군가를 사장실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주로 호통을 치거나 일을 더 주기 위해서였다.

한낱 아르바이트생이었던 나 역시 종종 불려갈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반드시 사장의 친구가 놀러 와 있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나는 사장실에서 호통을 듣거나 일을 더 받은 적이 전혀 없다. 다만 그들이 환담을 나누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을 뿐이다. 테이블에는 늘 세 개의 찻잔이 놓여 있고, 이야기 내용도 매한가지였다. 그들은 날 앉혀 두고, 어제 밤 유흥업소에서 아가씨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일에 대하여 매우 세세한 디테일까지 논했다. 그럼 나는 조용히 차를 마시며 적당히 십분 정도 기다렸다가, ‘이만 일하러 가겠습니다’ 하고 일어났다.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친구와의 대화로 돌아갔다. 별일 아니었다. 탈없이 매달 백이십 만원을 받아 다음 학기 등록금과 책값을 벌 수 있다면, 십 분 정도 멍청이들의 사생활을 들어주는 것 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종종, 사장의 초등학생 아들과 중학생 딸을 만날 수 있었더라면, 그래서 아빠가 대학생 언니와 차를 마시며 친구분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꼼꼼하게 들려줄 기회가 있었더라면 참 재미있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랬더라면, 아마도 사장은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창피해 했을 것이다. 그러게, 죽어버릴 만큼 창피한 짓을 대체 왜들 하는지 모르겠다.

<이현주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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