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간 나의 화두는 ‘후반기 인생 설계’였다. 정신 없이 달려왔던 전반기 경주를 일단락하고, 변경된 코스와 낯선 환경 속에서 새로운 경주 방식을 찾기 위해 진통하고 있다. ‘하프타임’에 관한 독서, 역사 속 인물들에 대한 연구, 인생 선배들과의 면담을 병행하며 길 찾기가 진행 중이다. 한걸음씩 내딛는 여정에 덜컹거림이 많다. 희망, 기대, 의욕으로 부푼 마음이 회의, 절망, 포기로 주저 앉기를 반복한다. 의미 있는 후반기 삶이 있긴 할까… 언어, 문화, 나이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내 안의 잠재성을 펼쳐낼 수 있을까… 드러낼 잠재성이 남아있긴 한 걸까… 앞을 가로 막는 장애물들과 밀당을 거듭하던 어느 순간 내가 싸우는 적의 정체가 내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역량, 나의 미래를 결정 하는 중요한 요인은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미우라 아야꼬. 소설 '빙점'으로 일본과 한국에 열풍을 불러일으킨 작가이다. 죄, 용서, 사랑 등 인간의 내면 심리를 깊이 있게 다룬 그녀의 작품 세계는 자신의 처절한 아픔을 밑거름으로 한 것이다. 스물 네 살에 갑작스런 고열로 병상에 누운 이후 13년간 천장만 쳐다보며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 했던 그녀…… 결핵, 직장암, 파킨슨 등의 난치병과 싸우며 벼랑 끝 인생의 실체를 뼈저리게 경험했다. 한 점의 희망도 찾기 힘든 삶에 반전을 일으킨 것은 지고 지순한 남편의 사랑이었다. 인간적인 악조건을 뛰어 넘은 남편의 헌신적이고 맹목적인 사랑을 통해 그녀의 삶은 불행의 이 끝에서 행복의 저 끝으로 이동했다. 결혼 후, 생계 유지를 위해 시작한 잡화점이 번창하자 이웃 가게들과 상생하고자 가게의 영업 시간을 줄이고 그 시간적 여유를 이용해 틈틈이 글을 쓴 아야코…...그렇게 탄생한 ‘빙점’은 '잡화점의 주부, 깊은 밤 글쓰기 1년'이라는 신문 기사를 장식하며 현상 공모전 최 우수작으로 당선 된다. ‘빙점’은 극진한 사랑을 받고 훈훈한 사랑을 나눈 그녀의 삶이 낳은 유기농 열매인 셈이다.
‘빙점’의 주인공 요코. 예쁘고 착하게 살아온 바른 생활의 표본인 그녀의 삶은 본인이 살인자의 딸이라는 (잘못된) 사실을 안 순간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죄악이라는 혼란에 빠지고,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정체성에 대한 절망감으로 마침내 자살을 시도한다. 요코가 살인자의 딸이라는 것은 잘못된 정보였음에도 생명을 앗아갈 만큼 위력이 있었다. 설령 사실이었던들 죽음을 초래할 만한 것인지의 진실 여부는 별개이다. 거짓과 사실, 사실과 진실 사이의 검증 단계들을 단번에 뛰어 넘어 효력을 발생시킨 것은 요코 본인의 판단과 생각이었다. 어쩌면 인간은 ‘내가 생각하는 나’일 뿐이며 그래서 마음의 편집이 필요한 것이다. 마음에 담긴 생각들이 행동을 결정하고 그 행동들이 삶을 만든다. 자기를 버린 친 엄마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던 요코는 눈 밭에 파인 비뚤어진 자신의 발자국을 돌아보며 자기도 온전할 수 없음을 깨닫고 용서의 마음을 열게 된다. 오해 받고 원망하며 얽히고 설켜버린 그녀의 삶을 치유하고 수정하는 열쇠는 결국 그녀의 마음 안에 있었다. 죄와 미움으로 얼어붙은 마음은 용서와 사랑으로 녹여내야 한다는 인생의 진리가 재조명된다.
임박한 유다의 멸망을 예언하며 회개를 촉구한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어린아이 같아서 말할 줄 모른다며 두려움으로 주저하던 그는 “네가 모태에서 생기기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선지자로 세웠다”는 전능자의 선언에 마음의 눈이 뜨이고 자기 존재의 특별성을 자각하게 된다. 그리고 유다 역사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핍박의 칼날에도 굴하지 않은 진리의 확성기가 되었다. 사실, 누구도 평범한 자는 없다.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는 존재 이전에 예정되고 태어나기 전에 선별되어 특별한 임무를 명 받은 요원들이다. 창조주의 선한 일을 위해 비범의 숙명을 띠고 태어난 자들이다. 백조였으나 백조임을 몰라 남과 다른 자기 모습에 혼란스러워 했던 미운 오리새끼… ‘다름’을 ‘못생김’이라 판단하는 주변의 편견대로 ‘못생긴 오리’ 외에 무엇도 될 수 없었던 슬픈 백조이야기… 다행히 같은 백조 무리를 만나 자신을 찾고 보란 듯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좀 더 일찍 자기의 ‘다름’을 ‘비범’으로 인식하고 백조스러움을 발휘했다면 어땠을까? 왕따의 비극이 뒤집혀 군계일학의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야코, 요코, 예레미야, 미운 오리새끼……후반기 인생 설계 여정에서 만난 이들의 삶을 통해 평범에서 비범으로 나아가는 나지막한 지혜의 속삭임을 듣는다. “답은 네 안에 있어!”
<
박주리 (선교사, 버클리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