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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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된 삶의 의미

2020-07-19 (일) 최수잔 / 워싱턴 두란노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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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여름방학때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을 읽고 인생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진실을 추구하고 진실을 믿으며 진실에 의해 무엇인가를 이루어내고 싶어하는 고결한 마음씨를 가진 수도사, 알렉세이에게 매료되었었다. ‘진실은 인간에게 빛이고 생명이며 희망인 하나님에게로 가는 길’ 이라고 생각한 작가의 믿음은 그 당시 하나님을 잘 모르던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기주의와 탐욕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러나 인간은 욕망을 가진 동시에 이성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지성과 감성 그리고 영성의 균형을 잡기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산다. “인간이 무엇이며 하나님은 과연 존재하는가” 라는 궁극적인 인간과 종교의 본질에 대해 이해 하려고 어렵고 두꺼운 책을 앞뒤로 들추어 보기도 했다. 이 책에 나오는 성경말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라는 의미가 이해된 건 교회를 다니고도 한참 후였다.

최근에 서울시장이, 몇 해 전에는 한국의 N국회의원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삶을 마감했다. 그가 저지른 인간기준의 법적인 죄가 하나님의 저울에선 얼마나 무거운지 몰라도 도덕의 기준이 되는 양심을 법보다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죽음의 길을 택했으리라 생각된다. 인간의 도리인 양심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진실과 통하고 곧 하나님의 길로 이른다고 믿었기 때문이리라.
대학 초기에 니체의 허무주의에 빠져 죽음을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친구들과 철학에 심취되어 인생의 허무함을 논하고 갓 입학한 대학 생활의 기쁨이 피어나기도 전에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나’ 라는 무거운 질문을 자신에게 했었다. “삶은 고통이며 불행이다” 라고 말한 쇼펜하우어의 비관주의 철학 입문을 읽고 생각하며 이틀 밤을 밝힌 때도 있었다. 그래도 정신이 말똥말똥해서 다음날 강의에 참석했다.


힘들게 공부해서 목적을 이룬 후에 생기는 허무감이랄까. 전공은 제쳐놓고 도서관에 앉아 철학 속에서 인생을 접했던 외로운 시절이었다. 니체를 비판한 하이데거, “인생은 탄생과 죽음사이의 선택이다” 라고 한 사르트르 등을 배우는 철학강의를 친구와 함께 청강했는데 점점 어려워지기도 했지만, 치중해야 할 전공과목에 밀려나서 계속하지는 못했다. 그 후 그룹미팅, 아르바이트, 채플시간을 거치며 대학생활에 익숙해져가고 바쁘게 지낼 수 있었던게 그 분위기를 빠저 나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 자살율의 증가가 심각하다는 질병통제예방센터의 보고가 나왔다. 자살은 경제적인 어려움, 질병, 성폭력, 좌절감, 노쇠, 사회적 고립, 외로움, 가족간의 갈등, 우울증, 정신적 불안감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과 결정권이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 때 살고자하는 의지가 약해진다. 행복한 가정을 가진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도 인생길을 걷다보면 부닥치는 많은 역경으로 죽음을 생각할 수 있다. 깜깜한 터널이 끝없이 이어질 것같은 인생열차 안에서 빛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고 용기가 생긴다.

마음을 편히 가져야 밝은 내일이 찾아온다. 겉으로 보기에 불행해 보여도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 있고 보기에는 행복의 조건을 다 갖춘 사람도 남모를 불행을 안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진정한 행복은 시련 가운데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 속에 존재한다. 그 과정을 겪는 동안 ‘누군가가 함께 하고 있다’ 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되면 삶에 활력이 된다. 생명의 소중함과 영혼의 소중한 가치를 중시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피부로 느끼고 희망을 전해주는 삶을 실천하고 싶다. 살면서 진실된 삶의 의미를 깨닫는 건 매우 중요하다. 한 영혼,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밀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있다.

<최수잔 / 워싱턴 두란노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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