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다리미질 단상

2020-07-16 (목) 이현원 / 워싱턴 문인회
크게 작게
내가 다리미질을 시작한 지는 여러 해 전이다. 가장으로서 정년퇴직하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을 때였다. ‘여보, 우리 나이에는 홀로서기 연습을 해야 해’ 아내가 나를 부려먹을 때 자주 쓰는 말이다.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긴 건강치 못한 아내의 말이니 더욱 피부에 와 닿는다.

그 말이 진심이든, 듣기 좋은 얘기든, 어깨 힘이 빠질 나이엔 아내 말을 들어주는 게 상책이다. 그렇지 않아도 집에서 주부의 일이 너무 많아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던 터였다. 못 이기는 척하고 가끔 밥을 짓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한다. 나아가 다림질까지 배웠다. 다리미의 특성서부터 옷 다리는 순서 등을 배우고 나니 어렵지 않았다. 다림질할 옷이 많을 때뿐만 아니라, 내 옷은 대부분 내가 다려서 입는다.
옷을 다리며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픽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어느새 거울 속에서 나의 존재를 새삼 깨닫는 일, 즉 이마나 눈가 그리고 턱 밑의 주름살이 이 다리미로 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칠십 대에서 오십 대 얼굴로 되돌아가겠지. 최소한 젊은이로부터 나이가 많은 노인이라고 홀대당하는 일은 없을 거야. 아마 아내와 나는 다리미 쟁탈전이라도 벌이지 않을까.

주름살은 어찌 보면 산전수전 겪은 인생의 훈장이랄 수 있으나. 오십 대의 팽팽한 얼굴로 돌아간다면 싫어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보다도 가슴이 구겨지거나 쓰라린 상처가 다림질 하나로 깨끗하게 펴진다면 더 바람이 없을 것이다. 이거야말로 삶을 기름지게 하는 명약이요, 아픈 곳을 쓸어주는 약손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다림질은 스트레스 해소로도 제격이다. 갑갑한 마음이 시원해진다. 다리미판 위에 답답함과 미움의 대상을 올려놓고 뜨거운 다리미로 쓱쓱 문지르면, 봄을 맞아 산의 눈이 녹아내리듯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을까. 어딘가 허전한 마음도 메워질 것이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방콕역 지나 면벽수도 절에서 춘안거(春安居)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위안이 될 듯하다.


그동안 부부 중심으로 조용히 지내다가, 근래에 미국으로 오게 되어 손자들과 한집에 살게 되니 그야말로 소용돌이치는 삶의 연속이다.
열 살과 열세 살짜리 극성스러운 두 손자 틈바구니에서 평소 나의 존재란 찾기가 쉽지 않다. 기본적인 집안일 보조 이외에 손자들 학업관리, 건강관리, 인성관리까지 뒷바라지함은 중노동이다. 손자들은 그들 엄마가 없는 이곳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발 닳는 보살핌은 당연하고, 때때로 그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라도 생기면 짜증 부리고 따지기도 한다. 손자들이 사춘기에 접어드니만큼 감정도 예민해진 것 같다. 잘못했을 때 야단치기보다는 달래고 설득시켜야 하나, 마음의 평정심을 잃고 훈계해야 할 경우도 있다. 그때는 나의 화신인 아바타가 대행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슴 속에 스트레스가 남몰래 쌓이기 마련이다.

‘그래, 너희도 긴장을 풀 곳이 있어야지. 너희는 아직 미국에 온 지 오래되지 않았고, 우리와 세대 차이도 있으니 오죽하겠느냐. 손자들아, 우리에게 불만을 쏟아내라. 우리는 다리미질로 갈증과 스트레스를 풀어버릴 테니까’.

<이현원 / 워싱턴 문인회>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