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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교] ‘인생의 베일’과 콜레라

2020-07-10 (금) 제이슨 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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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미친 짓은 사랑이다”라는 말이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요즈음, 미친 사랑과 전염병인 콜레라 이야기를 다룬 “윌리엄 섬머셋 모음”의 소설 '인생의 베일' 이야기로 잠시나마 독자들의 기분을 전환해 드리려고 한다. 주인공 키티는 변호사인 아버지와 욕심 많은 어머니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키티를 런던 상류사회의 사교계에 진출시키고 대단한 사윗감을 구하려 했으나 그런 신랑감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 한 남자가 나타났는데 훗날 남편이 되는 “웰터 페인”이다. 의사이며 세균학자였던 웰터는 표현은 잘 못했지만 키티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였다.

결혼 후 홍콩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으나 남편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결혼한 키티는 웰터의 사랑을 비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연인 챨스를 만났다. 총독부의 차관보이며 매력적이었던 그는 한순간에 키티의 마음을 빼앗아 버렸다. 챨스는 유부남이었지만 여자를 잘 유혹하는 홍콩 사교계의 소문난 바람둥이였다’

키티와 챨스는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밀회를 즐겼으며, 남편이 출근한 뒤 챨스를 집으로 불러 들이기도 했다. 불륜 행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웰터에게 들키게 되었다. 키티는 남편이 구역질 날만큼 싫었고 키스는 역겨웠었다고 고백한다. 웰터는 키티에게 냉정한 말투로 중국 본토에 있는 ‘메이탄푸’라는 콜레라가 창궐한 곳에 의료 책임자로 가기로 했다며 함께 가자고 제의 했다.


키티는 “난 안가요”라고 말했다. 웰터는 “그럼 나도 안 가겠소. 대신 당신을 챨스와의 간통 죄로 고소할 것이오!” 남편이 이렇게 강하게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당황하긴 했으나 자신을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이라 심정을 고백하면 용서해 주리라 믿고 챨스를 옹호하면서 진정으로 사랑하니 챨스와의 사랑을 인정해 달라고 사정했다. “챨스는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 나를 사랑해요.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당신과 결혼한 건 내 실수였어요.”

웰터는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한낱 바람둥이에 지나지 않는 챨스가 아내와 이혼하고 당신과 결혼한다면 순순히 놓아 주겠다는 것이었다. 키티는 챨스와의 결합을 꿈꾸며 달려가서 자랑스럽게 전했다. 챨스는 키티를 보고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그냥 콜레라 지역으로 남편을 따라 가는게 좋겠다고 말한다. 키티가 “그럼 이세상에 오직 나 말고는 원하는게 없다는 말은 왜 했죠?”라고 하자 챨스가 “오, 이런. 사랑에 빠진 남자의 말을 믿다니...” 실망과 배신감으로 찢어진 가슴을 안고 남편에게로 돌아와서 “챨스가 나를 버렸어요. 당신과 함께 그곳으로 가겠어요.” 웰터와 키티는 메이탄푸로 떠났다.
메이탄푸의 사정은 듣던 것 보다 훨씬 심각했다. 하루에도 수백명씩 죽어 나가고 있었다. 한번 전염이 되면 회복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거리는 시체로 넘쳐 났다. 웰터는 온종일 환자들을 돌보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키티는 무료하기 짝이 없는 시간을 보냈다. 키티는 비로소 남편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를 깨닫고 크게 뉘우친다. “아, 난 너무나 무가치한 인간이었구나.” 길게 한숨을 쉬었다.

웰터는 영혼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키티를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자 스스로를 용서할 수도 없게 되었다. 며칠 후 뜻밖에도 키티는 자신이 임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심스럽게 남편에게 알렸다. “내가 아이의 아버지인가?” 눈물을 떨구며 말하자 키티가 간신히 입을 떼었다. “모르겠어요!”

웰터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어느 날 밤 사람들이 그녀를 깨워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남편은 콜레라에 걸려 죽어 가고 있었다. “웰터, 제발 나를 용서해 주세요. 미안해요.” 웰터는 눈을 감지 못한 채 한줄기 연기처럼 떠났다. 스스로에게 콜레라 균을 주입하여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삼고 치료법을 개발하여 의사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중국의 콜레라를 퇴치한 다음 이 세상과 영원한 이별을 고했던 것이다.

남편을 잃은 키티가 홍콩으로 돌아오자 옛 애인 챨스는 “당신은 더 예뻐져서 돌아 왔어...”라고 하면서 여전히 농락의 대상으로만 여겼다. 챨스는 키티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고 곁에 두고자 했으나 키티는 그토록 경멸하던 챨스의 천박한 포옹에 온 몸을 내던진 자신을 용서 할 수 없었다. “웰터는 당신과 나 때문에 죽었어, 나는 육체적 욕망 밖에 모르는 창녀에 불과했어!” 뼈저린 후회를 하며 부모님이 계시는 영국으로 돌아 간다.

웰터는 부정한 아내 앞에 절망했고,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자살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의사면허를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후, 돈밖에 모르는 의사들도 많은 세상에 무서운 전염병과 싸우며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은 진정한 의사 웰터에게 존경과 박수를 보낸다.

<제이슨 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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