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미용실에 가면

2020-07-08 (수) 윤영순 / 우드스톡, MD
크게 작게
젊은 날 윤기나던 생 머리카락은 이제 어느 구석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오래 전부터 파마와 염색을 번갈아 반복해 왔으니 머리카락인들 온전할 리가 있겠나. 계절을 의식한 듯 푸석해 진 머리를 손질하러 미용실을 찾았다. 작은 전원도시에 한인들이 부쩍 유입된 탓인지 미용실 간판들이 여기저기 많이 눈에 뜨인다. 유독 수십 년째 한 자리에서 성업하고 있는 이 미용실만은 언제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어디선가 한번쯤은 봤음직한 얼굴들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앉으면 주변의 한인사회 돌아가는 이야기랑, 고국소식, 인생상담 같은 소소한 집안사가 대화의 전부를 차지하게 되는데, 그 중에도 입담 좋은 아주머니가 있게 마련이다. 조용하던 실내가 서서히 시끌벅적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열면, 마치 옛날 우물가에 모인 아낙네들의 수다처럼 활기가 넘치는 분위기가 연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소란스런 주위 분위기에 적당히 응수하면서, 그러나 부지런히 손님의 머리를 능숙한 솜씨로 매만지는 미용사의 절제된 말수와 작은 미소가 수 십 년이 넘도록 자신의 단골손님으로 끌어들이는 어쩌면 그녀만의 비결인 것 같다.

그녀와는 가까운 이웃사촌이다. 서로가 새벽운동을 좋아해서인지 동네를 걷다 보면 어느새 왔는지 앞에서 또는 등 뒤에서 인사하며 뛰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온종일 서서 일하는 작업이라, 꾸준한 운동과 부지런함이 건강을 지켜주는 체력이 되나보다 감탄할 때가 많다. 매일 새벽 같은 시간대에 만나 인사를 나누다 보면 마치 십년지기 친구처럼 느껴졌는지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싱싱한 풋나물과 과일을 손님들로부터 받았다며 문 앞에 두고 가는 일이 잦았다. 그녀의 남편과도 낮시간 산책을 통해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한가한 시간에는 가끔씩 우리 집에 들러 함께 대화하기를 즐겨 하는 것 같았다.


햇살이 눈부신 어느 여름 그들 부부의 제안으로 웨스트버지니아 버클리 스프링스로 드라이브 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틈날 때마다 식수도 받을 겸 소일삼아 가는데, 그날은 우리와 함께 동행하며 하루를 보내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그 곳은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 목욕을 했다는 온천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있고, 1862년 남북전쟁의 가장 참혹했던 격전지 앤티텀 전쟁터가 지나가는 길목에 있어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높은 산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물은 특히 물맛이 좋아 많은 이들이 식수를 뜨러 이곳을 찾아 온다는 이야기다. 초행길이라 가는 내내 경치가 아름다워 눈을 시원하게 하고, 푸짐한 생고기 구이집에서 네 사람이 배를 채우고 나니 긴긴 하루가 쉬이 지나갔다. 인연이란 묘해서 한 동네 이웃과의 우연한 만남이 십수년이 지나도록 지금까지 단골손님으로 한 미용실만을 이용하다 보니 인연치고는 대단한 인연이다.

이 곳에 살고 있는 동포가운데는 묵묵히 이웃이나 한인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과 단체가 있어 타인종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데, 그녀 역시 바쁜 일정 틈틈이 한 달에 한 번씩 무료로 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에서 노인들을 위해 머리를 손질해 주는 아름다운 봉사를 하고 있다니 대견스러울 뿐이다.
언제나 미용실에는 여성스런 주인의 취향 탓인지 미를 추구하는 분위기답게 사철 내내 푸른 나무와 아기자기한 꽃들이 실내를 장식하고 있다. 오늘도 마법사와 같은 그녀의 손길로 한결 밝고 젊어진 내 모습을 보며 여심의 본능, 예쁨, 앞에 내 나이쯤은 잠시 잊게 한다.

<윤영순 / 우드스톡, MD>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