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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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공유하지 않는 이데올로기

2020-07-01 (수) 이형국 / 정치 철학자,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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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에서는 혈통·유전자·신체적 특성이 같은 종족을 인종이라, 사회학에서는 관습·문화·언어를 함께 공유하는 사회집단을 민족이라 정의한다. 인종은 생물학적 동질성을 강조한 선천적 분류이며, 민족은 사회학적 동질성을 강조한 후천적 분류이다. 인종 분류와 인종차별은 18~19세기에 걸쳐, 백인우월주의는 19세기 초에 형성되었다.

흑인이 백인보다 고통을 잘 견디는 것은 상피나 진피 조직이 두꺼워 섬세한 촉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며, 백인보다 큰 흑인의 생식기, 백인 여성에 비해 쉽게 아이를 분만하는 흑인 여성, 검은 피부색과 곱슬머리 카락, 튀어나온 턱 등은 덜 진화된 원시인에 가깝다는 이론이 ‘복수인종설’이다. 흑인의 뇌는 백인보다 작고 가벼워 아둔하고 미련스러우며 지능이 낮아 열등한 인종이라는 학설이 ‘골상학’이다.
육체적·정신적 장애와 나태 습관에 젖은 빈곤의 삶은 유전적 결과물이라는 학설이 ‘우생학’이다. 백인은 18~19세기 이러한 비이성적 논증과 비과학적 해부를 통해 인종을 분류하며 인종차별을 400년 동안 저질러 왔다. 이것의 가장 큰 피해자는 흑인이었으며, 흑인은 정화와 분리, 그리고 멸종이 되어야 할 대상으로 취급되어 왔다.

19세기초, 식민지 정복과 원주민 대량학살은 인종간·민족간의 적자생존 투쟁의 메커니즘이며 우월한 인종과 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라는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인종의 서열화와 차별성을 강조하는 논리로 사용되어 제국주의자들에게는 정복과 대량학살을,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는 인종차별과 폭력을 정당화 시켜주었다.
이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루소와 달리 ‘인간불평등’ 원인을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약육강식 문제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인류 역사에 큰 에폭을 지은 영향력 있다는 이데올로기는 모두 남의 아이디어를 차용하여 오용한 결과로 형성되었다.
스펜서는 다원의 적자생존을 약육강식으로 오용했으며, 미제스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자유시장경제로 오용했으며, 레닌은 막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공산주의 혁명으로 오용했다.

미국 통계학자 호프만은 1896년 미국 사회에 인종차별 문화를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이다. 인종 정의에 대한 그의 탐구에서 일관된 큰 문제는 미국의 정체성에 얼마나 ‘백인우월주의’가 중요한가 였다.
이에 비해, 캘리포니아 주립대 미국사 교수 포레스트 우드는 ‘믿음의 오만’에서 개신교가 인종주의와 노예제도의 형성에 근본적인 역할을 했다는 논증을 제시했다.
문화 인류학자 프란츠 보아스(1858-1942)는 흑인의 열등성이 생물학적 산물이 아니라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백인들이 만들어낸 사회적 산물이라고 비판했다. 백인들은 더 풍부한 창의성과 더 많은 과학지식, 더 세분화된 사회조직을 토대로 자신들의 문화가 더 문명화 되었다고 추론하여 백인이 다른 인종보다 선천적으로 우월한 인종이라는 논리를 만들어 냈다.


미국사회에서 흑인은 단 한번도 문화적 진보를 이룰만한 동등한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그러나 흑인들은 자신들의 고향인 아프리카에서 놀랄만한 조각품이나 건축물, 금속공예품과 같은 문화적 창조물과 춤과 소울과 같은 예술적 창조물을 통해서 찬란한 문화를 이록했다는 것이다.
‘인종차별주의’와 ‘백인 우월주의’ 이데올로기는 선입견과 편견에 따른 오만의 자기 과시적 무의식의 인식론이다. 이로 인해 하얀 피부는 하얀 특권을 얻었고 검은 피부는 검은 차별을 얻었다. 자의식의 암묵적 흑인 편견에서 출발한 이중잣대는 점차적으로 유색인종과 개신교 이외의 종교, 동성애자, 장애자, 페미니스트에 적대적 표시를 드러내며 집단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극단주의 인종차별로 발전해가고 있다.
2044년까지 백인 인구가 더이상 다수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은 백인들의 불안을 증폭시켜 백인우월주의 정치운동을 부활시키고 있다. 최근의 예는 버지니아 샬럿츠빌에서 나타났다.

1960년대 백인우월주의자들은 “흑인은 미국의 악몽이다”라고 혹평했다. 흑인 해방운동가 말콤X는 “미국의 꿈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국의 악몽만 경험했습니다” 라고 되받아쳤다. 분명한 사실은 백인은 흑인을, 흑인은 백인을 서로 미국의 악몽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원인은 인종차별 폭력을 미국이 암묵적으로 방치하고 묵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흑인이 몰려있는 적색구역은 투자가 금지되고 은행 대출 또한 연방 보증이 안돼 개발이 봉쇄되어 빈민가를 만들었다. 더럽고 위험으로부터 격리된 거부된 공간은 빈곤·마약·질병으로 이어지는 법적 메커니즘의 결과이다. 흑인 공동체를 빈민구역의 쓰레기통에 몰아 넣고 인디언 보호구역(?)처럼 공간을 공유하지 않는 이상한 이데올로기 놀이를 대상만 바꾸어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이형국 / 정치 철학자,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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