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하나만을 위해 살아온 삶이었다. 그런데도 쉽지 않고 벅차다. 옆 친구보다 공부 잘해야 하고 옆집보다 더 잘 살아야 하는 그들을 이상하게 바라 보면서 자랐지만 나 자신도 어느덧 ‘나’밖에 모르는 무척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물론 나부터 먼저 챙길 수 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배워야 하고 자립해야 하며 가족을 생각해야 한다. 사회나 국가가 보호해 주기에 앞서 스스로 ‘수신제가’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세상의 구조가 나 하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의 마음 속에는 나 외의 것을 위한 공간이 있음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 우리는 하늘의 부름을 받을 때가 온다. 하늘은 우리에게 다시 태어날 기회를 반드시 준다고생각한다. 그것이 어둠을 통해서건, 거친 돌을 맞아서건 아니면 광풍의 회오리 바람 속에 밀려서건 말이다. 다시 태어남은 대개 ‘나’를 넘어서는 사건이다. 나를 넘어 우주를 보든 내 안의 영혼을 보든 무언가 다른 것이 보이는 때이다. 그런데 의외로 바로 옆의 ‘이웃’이 다시 보이게 되는 경우가 있다. 관심과 가치의 대상이 나에게서 남에게로 전환되는 대사건이다.
우리의 시선은 카메라처럼 시시각각 앵글이 돌아가며 세상을 비춘다. 태어나서 엄마를 바라보던 눈이 어느덧 동네 아이들을 보게 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세상의 이치를 바라보게 된다.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는 눈을 가지게 되며 여러가지로 투쟁해야 하는 세상사를 만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내 눈을 통해 들어오며 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그런데 또한 우리의 눈은 헛것에 쉽게 휩쓸리는 경향이 있다. 눈은 우리의 귀중한 감성과 정보의 창문이지만 잘못하면 우리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유혹과 협상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
사실, 혼자의 힘으로 자기 눈의 방향을 제대로 선택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한 인생 내내 나만을 바라보며 나의 잔이 넘칠 때까지 물을 붓다가 그 잔이 하도 깊어서 내 잔도 못 채우고 이 생을 하직할까 두렵기도 하지만,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진정으로 보아야 할 것을 못 보고 가게 되는 경우이다. 그래서 하늘의 도움이 필요하고 이끌어 주는 스승이 필요한 것이다.
‘만향’ 이라는 분이 있었다. 난을 치고 그 위에 시를 쓴 수묵화를 남겼다. 그게 유마에 관한 글과 그림인 ‘불이선란’이 되었다. ‘난을 안 친지 20년이 되었다고. 그런데 오랫만에 난을 치며 ‘불이선(不二禪)’의 경지를 그리게 되었다고. 누가 물으면 굳이 대답 않고 유마처럼 묵언으로 대신 하겠다고.’ 그 마음속 스승중에 유마가 있음을 알 수 있다.여기서 만향은 추사 김정희의 다른 호다. 그가 말년에 불도를 닦았음을 볼 수 있다. 난을 그리며 난이 아닌 성중천의선(禪)을 그렸다. 유마의불이문(不二門)의 이름을 붙였으니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한다는 것이겠지. 하긴 하늘에 이르는 마음이 둘이 있겠는가? 난과 선도 둘이 아님은 자명하다.
유마는 인도 석가시대의 보살이다. 출가하지 않고 시중에 남아 불도를 닦으니 소위 ‘거사’라 칭한다. 어느 날 유마가 아프다는 소식을 접한 석가세존은 제자들에게 병 문안 갈 것을 권한다. 그런데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는다. 모두가 그는 너무나 두렵고 벅찬 상대임을 고백하기에 급급해 한다. 한다하는 석가의 제자들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이에 석가는 그중 제일 지혜롭다는 문수보살을 지명하여 문안을 보내게 된다. 문수보살 뒤로 500여 제자가 따르고 드디어 유마의 방 앞에 이른다. 방장 안에 들어간 문수가 유마에게 설법을 청한다. 이에 유마는 침묵의 시간을 가진다. 그 유명한 유마의’묵언’ 이다. 문수는 이 법을 받아 들이고 잘 깨달았음을 밝히고 방을 나온다. 유마는 대승의 문을 열어 놓은 큰 인물이다. 열반에서 끝날 수 있는 소승의 구도에서 중생제도 라는 자비의 길을 제시하고, 출가인이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부처의 길이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추사 김정희의 그림에 제주 유배중에 그린 ‘세한도’ 가 있다. 바른듯 삐닥한 그림, 삭막한 겨울 소나무, 세한도(歲寒圖), 마치 우리네 인생같이 기준이 모호하다. 그 모호함이 우리로 하여금 마음이 부르트도록 그 의도를 찾게 만든다. 쉽지 않은 세상살이 이기에, 바르게 살기엔 더욱 쉽지 않기에 차라리 수수께끼 같은 그림으로 세상을 풍자한 것일까? 중요한 것은 거기에도 ‘성중천(性中天)’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세상을 다 잃은 사람에게 남는 것은 ‘하늘의 뜻에 부합하는 마음 하나 찾는 것’일 것이다. 그 경지에서만 겨우 숨을 쉬고 살만한 모양이다. 유마는 묵언으로 그 뜻을 대신했고, 추사 김정희는 불이문의 경지를 난으로 그렸고 세한도로 삭막한 선비의 지조스런 마음을 보였다. 이 모두가 하늘을 우러르는 길을 닦는 마음 아닐까?
우리에게는 사랑해야 할 많은 대상들이 있다. 이웃과 중생에 대한 개인적 애정은 하나의 새로운 ‘가치탄생’(不二)이다. 내 눈이 먼저 하늘을 쳐다보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혁명적인 일이다. 숱한 선인들의 구도(求道)가 하늘나라에 시각을 맞추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의 삶에서도 한번은 바뀌어야 하는 눈과 마음의 전환인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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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영무 (치과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