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정중한 인종차별’이 미국의 민낯인가

2020-06-24 (수) 김지나 / 엘리컷시티, MD
크게 작게

▶ 김지나의 살며 생각하며

사건은 리사(Lisa) 부부 즉 백인부부가 산책을 하다가 한 필리핀계 남성이 낮은 담벽에 “BLACK LIVES MATTER”이라 쓰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되면서부터다. 그냥 지나치면 될 일을 리사는 이 남성이 비싼 자신의 동네에서 비싼 집 담에 주인의 허락없이 낙서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정중하고 상냥하게 ‘남의 소유물에 낙서를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남자는 ‘이건 내 문제’라고 대답했지만 ‘그럼 안된다’고 리사가 재차 말했다. 남자는 ‘그럼 이 집이 내 집이면 문제가 되지 않는 거냐’고 물었는데 리사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내가 이 집주인을 잘 안다’고 대답했다. 남성은 너무 놀란 목소리로 ‘어? 그래? 그럼 당신은 경찰에 신고하면 되겠네’라고 말했는데 리사는 아주 정중히 대답하고 뒤돌아 신고했다.
결국, 곧바로 경찰이 도착했다. 놀랄 일은 그 다음이다. 그 집이 정말 이 남자의 집이었다. 며칠 뒤 이 남자는 비디오를 세상에 공개했고 아주 빠른 속도로 파급되었다. 알고 보니 리사는 유명한 화장품회사 Laface의 최고 경영자인 Lisa Alexamker이고 글을 쓴 남자는 필리핀계 아메리칸 Juannillo였다.

난 이 비디오를 접하고 가장 당혹스러웠던 점은 인종차별도 문제였지만 이 리사처럼 백인의 행동이 타인종에게 너무 정중하다는 데에 있다고 봤다.
리사가 그 남자에게 했던 행동처럼 이들은 겉으로는 너무도 정중하게 친절하게 웃으며 대한다. 비디오를 자세히 보면 리사는 소리를 높이거나 경악해서 대화하지 않는다. 웃는 얼굴에 자기가 생각한 말을 정확히 전달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과 일상을 이야기하는듯한 얼굴과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남자도 정중하게 답하고 묻는다. 이게 바로 이 사회 백인들, 특히 배운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의 정중한 인종차별이다.

인종차별은 나는 잘났고 남은 못났다는 지극히 사적인 감정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나는 당신보다 우월한 인자이고 나는 당신 위에서 군림하고 있다는 마음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백인은 다른 인종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흑인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은 것과 같다. 피부가 검다고 해서 마음도 검고 생각도 검은 게 결코 아니다.
나 또한 내가 만약 한국에서만 살았다면 인종에 대한 깊은 성찰이 결코 없었을 것이라 단언한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살면서 백인의 사회를 엿보게 되고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보니 알게 되는 것들이다. 백인이라고 모두가 인종차별을 하는 것은 아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을 만들어 백인 사회 전체를 흔들어 버리는 결과가 되는 일도 허다하다.


하지만 이들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호수에 장난으로 던진 작은 돌 하나에 어떤 개구리는 피 토하며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백인인 리사가 아주 정중하게 Juannillo에게 ‘남의 소유물에 낙서하면 안돼’라며 웃으며 이야기해서는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리사는 분명히 인종차별을 했다고 시인했지만, 그 내면의 마음까지 용서를 받고 상처를 덮기에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동양인은 절대 그런 높은 집에서 살 수 없다는 생각만큼 그렇게 높게 쌓아 올려진 인종차별의 굳은 믿음을 무엇으로 깨트릴 수 있을까?
대놓고 목을 졸라 흑인을 숨지게 한 백인 경찰의 인종차별을 넘어 정중하게 인종차별 하는 소위 화이트 칼라 백인들의 만행은 이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절대 풀릴 수 없는 문제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왜 한가지가 아닌 세 가지 종류의 인간을 만드셨는지 그걸 원망하는 일밖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다만 우리가 남녀를 알 수 없이 태어나듯이 흑백도 우리의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 그냥 인간의 색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그런 날이 오기만을 슬프지만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을듯하다. 참으로 슬픈 ‘정중한 인종차별’이다.

<김지나 / 엘리컷시티, MD>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