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은 1780년 6월 24일 청나라 건륭제 칠순 축하 사신단에 끼어서 북경을 경유하여 열하로 가게 된다. 말 안장에 주머니 한 쌍을 달고 벼루, 붓 두자루, 먹 한장, 공책 4권, 이정록 한 축만 넣고 길을 떠나 2개월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열하일기를 기록했다. 압록강을 건넌 후 2주일 지나 7월 8일 요동벌로 들어서게 된다.
요동벌은 “하늘 끝과 땅 끝이 맞닿아 서 아교풀로 붙인 듯 실로 꿰멘 듯”한 천이백리 벌판이다. 그날의 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정진사의 하인 태복이가 갑자기 앞으로 나와 머리를 조아리며 ‘백탑이 현신함을 아뢰오’라 했다. 마음이 설레어 이리저리 보았으나 산이 아직 가로막혀 잘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말을 채찍질 하여 수십 걸음 못가서 막 모롱이를 벗어났다. 나도 모르는 사이 이마에 손을 얹고 이렇게 외쳤다. ‘훌륭한 울음터로구나! 한바탕 울어보자!” 요동벌의 광활함이 연암으로 하여금 울음터로 정하게 했다.
그런데 나의 울음터는 연암과 정반대다. 구석진 골방이어야 한다. 아무도 내가 우는 것을 알지 못해야 한다. 그래야 내 슬픔의 가닥을 꺼낼 수 있다. 한 번 슬픔의 줄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줄줄이 꿰어져 한없이 나온다. 엉엉 소리와 함께 눈물과 콧물로 숨이 막혀 헉헉거리기도 한다. 한참 울면 지쳐서 제풀에 쓰러진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다음이다. 몸은 파김치가 되었어도 마음은 텅 비었다. 가벼워졌다. 슬픔의 덩어리가 눈물과 콧물로 울음소리로 녹아버린 듯 하다. 그리고 내 삶이 새롭게 보인다. 나는 더이상 그 슬픔의 주체가 아니고 그 슬픔을 보는 3자가 되어 있다.
연암과 나란히 옆에서 말을 타고 가는 정진사가 묻는다. “하늘과 땅 사이의 툭 트인 경계를 보고 별안간 통곡을 생각하시다니, 무슨 말씀이시온지?”. 그의 답은 “그렇지, 그렇고 말고! 아니지 아니지 말고…” 라고 묘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울음이란 다만 사람이 편리하게 칠정 중에 슬픔과 짝지어 놓은 것이지 본래는 강한 감정이 복받쳤을 때 우레와 같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세상에 태어날 때의 울음은 태어나 살면서 겪어야 할 여러가지 근심 걱정을 생각하며 ‘자신을 먼저 조문하기 위해서 운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사실은 캄캄한 어머니 뱃속에서 쪼그리고 있다가 갑자기 탁 트이고 환한 곳으로 나와서 너무 시원해서 참된 소리를 내어 자기 마음을 크게 펼쳐보고 싶어서 하는 것이다.”
지금 미국민의 가슴엔 울분이 끓는다. 코로나19로 인한 생존과 경제위기의 근심에 더하여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공권력의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인종차별을 목격했다.
한 시민을 수갑에 채워 길바닥에 쓰러뜨려 놓고 무장 경찰이 무릎으로 사람의 목을 조인다. ‘숨을 쉴 수 없어! 숨을 쉴 수 없어!”, “마마, 마마” 하며 어머니를 부르는 마지막 생명의 가느다란 외침에도 그 경찰의 무릎은 그의 목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미국이라는 사회의 인종차별이 법제화되어 있고 조직화 되어 있어서 죄없는 목숨의 무수한 희생에도 아랑곳하지 않음을 목격해 왔다. 우리도 조지 플로이드가 외친 “숨을 못 쉬겠어” 하는 답답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트럼프가 당선되고 며칠 안되어 한 환경 컨퍼런스에서 참석했었다. 참석자 모두는 이미 늦어질 대로 늦어진 기후변화 대응이 더 이상 구제할 수 없다는 걱정으로 침울해 했다. 연사 중 한사람이 제안했다. ‘국가 통곡의 날’을 제정하자는 것이다. 일년에 하루만이라도 인간의 잔혹함으로 고통받고 멸종되는 모든 동식물을 생각하며 통곡하자는 제안이었다.
연암이 요동벌을 그렇게 했던 것처럼 우리도 미국을 울음터로 만들면 어떨까? 여러 인종이 함께 살고 있는 이민의 나라, 이 광활한 대륙을 일년에 하루는 여러가지 서러움을 토해내는 울음터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희생자들과 경찰들, 시민들과 대통령,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남녀노소 모두가 다 거리에 나온다. 그래서 그냥 운다. 통곡한다. 그 슬픔의 원인이 무엇이든 좋다. 가슴 밑바닥에 억눌려 나오지 못했던 슬픔이라는 짐승을 꺼내어 보는 것이다. 그 짐승이 눈물로 콧물로 울음으로 녹아질 때까지.
그날 하루는 시위도 없고 총소리도 없고 수류탄도 없고 다만 울음소리만이 광활한 대륙 미국의 하늘에 가득 찰 것이다. 그러고 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전과는 조금 달라져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삶과 국가의 운명 그리고 지구의 운명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마음에 가까워져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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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영 / 시납스 인터내셔날 대표, D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