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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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흙 산책길을 밟으며

2020-06-23 (화) 문성길 의사 / 전 워싱턴서울대동창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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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21세기를 함께 살아가는 다 같은 현대인들이라고 애써 자위를 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너무도 천양지차이기 때문일 것이다.
테슬라의 엘론 머스크(Elon Musk)는 정부에서도 손을 놓은 지 10년이 넘는 우주여행 사업을 순전히 개인의 물심양면의 노력으로 4번째 시도 만에 성공적으로 우주선을 5월말 쏘아 올렸다. 2030년에 인간을 화성에 우주여행시킴이 목적이라 한다.
세계는 바야흐로 듣기에도 생소한 4차 산업혁명이라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내 친구 중 한 명은 1970-80년대의 컴퓨터 1세대의 한 사람이라고 우기나 실은 인터넷으로 친구들과 소통도 못하는 소위 컴맹으로 전락했다.

4세대 산업혁명(소위 융합혁명시대)은 인공지능, 로봇 산업, 빅 데이터, 클라우드 컴퓨팅 등으로 대표되어진다는데 이에 낙오되지 말라고 충고를 해준다.
이런 것들은 활기차고 명석한 젊은이들의 전유물이라고 애써 외면해버려야 할 지, 아니면 늙은이가 주책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무시하고 열심히 뒤좇아 배워야 할 지 망설이게 된다. 황새 따르려다 뱁새 가랑이 찢어지는 꼴이나 되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나는 여기서 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이 은퇴 후 전직인 고교 선생님으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표명한 것을 상기하고자 한다. 4차 산업혁명뿐만 아니라 사회가 급속도 발전함에 따라 기술력을 갖추지 못한 계층뿐만 아니라 고도의 전문직종도 극히 일부만 제외하고 점차 줄어들거나 아예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때 살아남는 방법 중 하나는 기계가 신이 아닌 이상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감성이 포함되지 않으면 아니 되는 일이나 직종에 눈을 돌리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술계통이 그 하나 이겠다. 또한 그런저런 약으로 처방하며 일률적으로 치료하고 있는 의료체계 중 특히 정신, 신경계통에서 보다 의사답게 환자를 정서적으로 이해하고 도와주려는 시도는 아무리 기계문명이 발전한다 해도 독자적, 독보적 영역으로 계속 건재할 듯싶다.
문경새재의 어느 구간에서 보드라운 흙길을 맨발로 걷는 행사가 해마다 열린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평소에 산속의 울퉁불퉁한 등산로를 걷다 보드라운 흙길이 나오면 어찌 그리 반가운지 모른다. 따라잡을 수 없는 문명의 속도에 지친 이들에게 문경새재의 흙길 행사는 얼마나 큰 위안이 될까. 문득 그 유명한 흙길로 산책하는 이들의 심신을 한결 부드럽게 해주던 워싱턴의 C & O Canal(Chespeake & Ohio Canal)이 생각난다.


오늘 나는 새벽에 일어나 해변의 산길을 2시간여 걸었다. 일부 구역만 빼곤 흙길이다. 이런 천혜의 등산로를 걷는 기회에 오직 감사할 뿐이며 잠시 모든 시름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침 식사하러 나왔는지 분주하게 숲속을 들락거리는 귀여운 산토끼들이며 자그마한 나뭇가지와 잎사귀 위에 앙증스럽게 매달려 있는 달팽이들과의 대화는 전혀 예상 밖의 덤이다.

아무리 현대 문명기기가 좋다곤 하나 이런 흙냄새 맡으며 쉬엄쉬엄 쉬어감도 우리들 누구에게나 때론 필요하지 않을까?
온 지구상에서 들끓고 있는 사회적, 조직적, 재정적 불평등의 시정을 촉구하며 생존권을 위해 절규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흙냄새 맡으며 쉬엄쉬엄 쉬어가라는 말은 한낱 사치스런 한가한 소리로 밖에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일부이긴 하나 철저한 백인우월주의 신봉자들이 아직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한 그들과 21세기의 동 시대인 임을 운운함이 천부당만부당 오히려 심히 부끄러워진다.
우리 인간들은 예외 없이 흙에서 유래했다 흙으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왜들 이러는지 모르겠다. 새삼 흙길이 그리워진다.

<문성길 의사 / 전 워싱턴서울대동창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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