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5일 저녁, 미네소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경찰 데릭 쇼빈이 흑인 피의자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피의자가 땅에 엎드린 상태에서 양손을 뒤로 수갑을 채우고 경찰이 무릎으로 피의자의 목을 약 9분간 누르고 있었던 연유로 병원 이송 중 사망했다. 현장에 있던 한 시민이 셀폰으로 영상을 촬영한 덕분에 온 세상이 알게 됐다.
미니애폴리스 시장은 즉시 해당 경관과 동조한 경관 세 명을 해고했고 쇼빈은 이급살인(2rd degree Murder)과 단순살인(Manslaughter)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셀폰 영상 증거가 없었더라면 묻혀버릴 뻔한 사건이다. 플로이드가 목이 눌린 상태에서 절규한“I can- not breathe”. “I am dying”의 호소가 국민을 더욱 분노케 한다. 현장에 있었던 동료 경관 세명은 2급 살인 동조 및 고무혐의(2nd degree aiding & abetting Murder)로 역시 구속기소된 상태다.
사건 다음날부터 분노한 시민의 항거(Protests)는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소요사태의 원인을 분석함에 있어서 백인경찰과 흑인피해자의 시각만으로 사건을 주시함으로써 시민 봉기를 흑백 분쟁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부류가 있지만 그러한 시각은 소수에 불과하다. 데모대에 참여하는 다수의 백인 젊은이들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백인우월주의(White supremacy)가 사건의 원인이다. 플로이드를 살해한 경찰이 이에 속한다. 이러한 인종차별적 감성은 뿌리깊은 역사에 기인하기 때문에 근절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의 인종차별적 문화는 1619년 8월 네덜란드 상선이 아프리카 앙고라 청년 20여명을 미국으로 압송, 노예로 팔아넘긴 사건으로 시작된다. 흑인은 인간이 아니고 주인의 재산이라는 생각이 미국인 마음에 자리 잡기 시작한다. 그후 노예 매매금지법이 발효될 때까지 31만명을 아프리카로 부터, 29만명을 카리브 제도로부터 총 60만명의 흑인을 압송해온다. 그 후에도 50여년간 불법으로 노예매매가 암암리에 이루어진다. 그 시대에 노예를 소유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조지 워싱턴도, 민주주의의 아버지인 토마스 제퍼슨도 수백명의 노예를 소유한 걸 보면 그러하다.
1857년 대법원은 아프리카 후손은 미국시민이 될 수 없고 국회는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법을 제정할 권한이 없다고 판시한다. 혁명 외에는 답이 없는 지경까지 온 것이다. 1861년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 혁명전을 감행한다. 남북전쟁(Civil war 1861-65)이 그것이다. 62만명이 전사한 성전에서 노예해방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쟁취한다. 그러나 흑인 경시문화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 만무다.
1896년 대법원은 차별하더라도 동등한 대우를 제공한다면(Separate, but equal) “차별로 볼 수 없다”는 판례를 내놓는다. 백인 우월주의 사상은 이와 같이 법의 보호 하에 지속된다. 식당 정문에 흑인과 개의 출입을 금한다(No blacks and dogs are allowed)는 간판을 버젓이 걸어놓고 영업하는가 하면 흑인 린치사건은 다반사였다. KKK(Ku Klux Klan)가 공공연하게 흑인을 린치하지만, 경찰도 검찰도 흑인 린치사건에는 눈을 감는다. 판사가 KKK 단원인 경우가 허다했으니 흑인 차별에 대한 정의가 이루어질 리 없다. 불과 수십 년 전인 1950년대까지 계속되다 드디어 “Separate, but equal” 판례가 뒤집히는 계기를 맞는다.
1954년 대법원은 흑인 아동의 입학을 거부한 백인학교가 동등권을 위반했음을 지적, “분리자체가 근본적 불평등”이라는 대법관 전원 일치 판례를 내놓는다. 역사상 처음으로 흑백 아동이 함께 어울려 공부하는 토양이 조성된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자라서 오바마를 선택한다.
마틴 루터 킹 목사(1929-1968)의 민권운동이 힘을 보탠다. 존슨 대통령도 국회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민권법(Civil rights act of 1964)을 통과시킨다. 모든 공공장소에서의 차별을 금하는 법이다. 흑인 출입을 금하는 간판을 내리든가, 식당 문을 닫아야 했다. 백인 우월주의에 쐐기를 박는 법이다. 인종차별을 방지하기 위한 더 이상의 법적조치가 필요 없게 됐다. 국민 모두가 백인 우월주의를 배척하는 일상생활에서의 행위로 사회를 정화해야 할 일만 남았다.
흑인이 최초로 미국에 도착한 지 400년, 노예매매가 금지된 지 200여년이 지난 오늘날 흑인대통령을 선출할 정도로 흑인을 보는 시각이 바뀌었다. 계속해서 바뀌고 있다.
조지 플로이드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쇼빈과 동료경찰관의 행위에 대한 법적 책임은 배심원이 정할 일이지만, 도의적인 책임은 평소에 인종차별 행위를 방관해 온 국민, 유년시절의 선생님, 직장동료, 인종차별에 무감각한, 또는 본인의 인기를 위해서 인종차별을 부추기는 정치인에게 있다고 단언한다. 플로이드의 죽음은 백인 우월주의가 낳은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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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탁 변호사/ 페어팩스,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