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랑이 휩쓸고 지나갔다고 할까. 질풍노도 시대를 맞았다고 할까.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이후 지난 10여 일 동안의 미국이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두 달이 넘도록 메이저 채널에서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됐던 것은 온통 코로나 19 관련 뉴스였다. 온라인, 페이스 북 등 미디어에도 차고 넘친 것은 코로나 19 뉴스였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조금이라도 등한히 한다. 그러면 질타가 쏟아지면서.
그 코로나 19 뉴스가 어느 날 TV에서 사라졌다. 대신 채워진 영상은 시위에, 약탈, 방화, 폭동의 모습이다. 백인 경찰관에 목이 짓눌린 상태에서 “숨 쉴 수 없어”란 말을 반복하다가 죽은 플로이드. 그 장면이 담긴 동영상은 쉬지 않고 방영되면서.
그 와중에 코로나 19은 실종됐다. 한 매체연구소에 따르면 거의 24시간 내내 방송됐던 코로나 관련 뉴스는 CNN, MSNBC, FOX 뉴스 등의 방송시간의 3%를 차지한 것으로 조사된 것.
시위는 해외를 포함해 140여개 도시로 번졌다. 동원된 주방위군 병력만 7만4,000여명으로 메이저 채널을 통해 전 세계로 방영된 미국은 한 마디로 ‘내란상태의 나라’였다. 이와 함께 가장 많이 들려온 소리는 ‘제도적 차별주의’란 말이다. 미국은 인종차별 국가이고 그 주범은 백인, 그 중에서도 백인남성, 그리고 트럼프 백악관인 양 은연중 비쳐진 것이다.
이번 폭동은 그러면 인종차별이 불러온 것인가. “그보다는 오늘날 시대의 사회적 거대 질환인 아노미적 자살증후군으로 보아야하지 않을까.” 문명비평가 데이비 골드먼의 말이다.
무슨 말인가. 그 본질에 있어 1992년의 LA 폭동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당시 폭동도 흑인 범죄용의자에 대한 경찰의 과잉대응으로 촉발됐다. 그러나 폭동을 불러온 근본 원인은 경제적 어려움, 그에 따른 집단성 자해적 행태에서 찾아진다는 것이 이제 와서의 결론이다.
소련과의 냉전이 종식되면서 남가주 일원의 국방산업계는 대폭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그 타격을 가장 크게 입은 지역이 LA의 사우스센트럴 지역이다. 얼마 전까지 고액 근로자였던 이 지역 국방산업 종사자들은 실업자가 됐다. 이와 동시에 커뮤니티 경제도 무너지고 만 것.
중산층 탈출상황이 발생했다. 그 뒤를 찾아온 것은 무기력에 빈곤, 그리고 분노였다. 때 마침 발생한 로드니 킹 사건이 도화선이 돼 폭동이 발생, 그 불길은 북쪽으로 번지면서 한인타운도 초토화된 것이다.
“이미 수년 전부터 대도시 빈곤층과 수백만에 이르는 근로계층의 소외감은 계속 깊어가고 있었다. 경찰의 과잉단속에 따른 플로이드의 사망이 그 소외감에 불을 댕긴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도시문제 전문가 조엘 코트킨의 진단이다.
팬데믹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계층은 도시의 빈곤층이다. 이번 코로나 19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망자가 가장 많은 곳도 바로 도시의 빈곤층 지역이다. 그리고 뒤따른 봉쇄령의 가장 큰 피해자 역시 도시의 빈곤층이다.
4월에 없어진 직장(job)의 거의 절반은 식당, 호텔, 놀이공원 등의 비교적 낮은 급료의 서비스업종에 몰려있다. 팬데믹과 뒤이은 봉쇄령은 컴퓨터를 통한 재택근무가 가능한 전문 내지 준 전문 직종에는 별 영향을 주지 않았다. 연소득 4만달러 이하의 소득계층의 40%가 실업자가 되는 등 직격탄을 맞은 것. 문제는 경기가 회복되어도 이들 계층의 경제적 전망은 여전히 어둡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러면 미국만의 현상인가. 아니다. 일종의 전 세계적 현상이다.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 서구는 물론이고 일본, 중국, 싱가포르 등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보고가 잇달고 있다.
팬데믹과 뒤이은 봉쇄령에 따른 사회적 분화현상은 개발도상국에서도 계속 확산되면서 그 결과로 16억명이 직장을 잃을 것으로 국제노동기구는 내다보고 있다. 상황이 더 심화될 경우 뭄바이, 델리, 라고스, 사웅파울로, 멕시코시티 등 제 3세계의 거대도시들이 폭동에 휘말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거다.
왜 미국의 메이저 채널들은 이번 폭동을 주로 인종차별의 앵글에서만 다루면서 듣기에 따라서는 선동적인 방송을 마다않고 있는 것일까. ‘당신의 침묵은 바로 폭력이다’라는 시위대의 구호를 클로즈업 시키면서 ‘조용한 다수’를 은연중 인종차별 방조자로 몰고 가는 듯한 내러티브를 구사하는 등.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 다시 말해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대세가 된 세태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다른 말이 아니다. 거대한 문화전쟁은 계속 이어지고 있고 트럼프의 재선이 걸린 대통령 선거의 해를 맞아 일종의 정치적 프레임 씌우기 전쟁에 돌입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트럼프가 폭동의 배후세력으로 극좌 성향의 무정부주의자 조직인 ‘안티파(Antifa)’를 지목하고 군 동원 가능성을 제시하자 미국을 분열시키는 대통령으로 몰아간 것이 그 한 예다.
그러면 폭동진압을 위한 군 동원에 대해 미국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주방위군 동원에 등록유권자의 71%가 찬성했다, 또 58%는 필요하다면 현역인 연방군 동원도 찬성하고 있다는 것이 아메리칸 스펙테이터지의 보도다. 그러니까 미국의 ‘조용한 다수’는 트럼프와 같은 생각이라는 거다.
이 ‘조용한 다수’는 과연 누구에게 표를 던질까. 올 대선의 주 관전 포인트로 보인다.
<
옥세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