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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썽사나운 ‘분열의 리더십’

2020-06-04 (목)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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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지금 미증유의 혼돈에 빠져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그에 따른 경제 붕괴로 수많은 국민들이 불안과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는 가운데 경찰 공권력에 의한 흑인 사망으로 촉발된 폭력 유혈시위가 격화되면서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대혼란이 지속되고 있다. “모두가 화약고 안에 살고 있다”는 표현까지 나온다. 세계 최강국의 모습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런 국가적 혼란은 오랜 세월 누적돼온 사회경제적 문제들이 한꺼번에 곪아터진 결과다. 하지만 이것들만으로 현재의 혼란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이른 데는 갈등을 수습하고 봉합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이를 부추기는 분열적 행태를 지속해온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

트럼프는 격화되는 시위를 진정시키려하기보다 군대를 동원하겠다는 으름장으로 시위대를 자극하면서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대항시위를 부추기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시위 배후에 민주당이 있다는 식의 근거 없는 주장도 되풀이했다. 모든 걸 정파적으로만 보는 그의 이런 인식이 미국의 통합과 치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과연 트럼프에게 현재의 국가적 위기를 수습할 능력이 있는지, 그럴 의지가 있기는 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통합이 아니라 갈등과 분열을 통해 정치적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트럼프가 정치 입문 이후 구사해온 기본전략이다. 그는 대권 도전에서부터 백악관에 입성한 후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이런 전략과 스타일을 보여 왔다. 지난 열흘간의 혼란을 통해 그의 이런 스타일이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는 것뿐이다.

국민들에게 통합을 호소해야할 대통령이 ‘법과 질서’를 앞세우며 강경한 발언을 계속하고 있는 데는 바로 이런 계산이 숨어있다. 그는 소요사태를 코로나19로부터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는 기회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또 사태가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연방군 투입을 시사해 ‘힘’이라는 가치를 신봉하는 자신의 지지층을 결집시키려는 의도 또한 엿보인다.

그의 핵심 지지층은 백인우월주의자들이다. 몇 년 전 버지니아 샬러츠빌에서 백인우월주의자들이 폭력시위를 벌였을 때 트럼프는 이들에 대한 비판을 회피했다. 트럼프가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우호적이라는 건 비밀이 아니다. 이들은 트럼프의 가장 견고한 지지층이자, 불가능해 보이던 그의 백악관행을 견인해준 공신세력이다. 당시 샬러츠빌 테러는 누가 봐도 명백한 범죄행위였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자신의 ‘집토끼’들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정파적 판단에 매몰돼 국가지도자로서의 도덕적 책무를 저버렸다.

트럼프는 어차피 자신이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제한된 골수 지지층들을 결집시켜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고 이들의 충성심을 바탕으로 재선을 모색하겠다는 게 그의 의중이다. 그래서 트럼프는 시위사태에 따른 불안정을 자신에게 유리한 사안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비상한 통합의 리더십이 요구되는 역사적 순간에도 그는 정치적 이익을 우선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그의 정치적 계산과 맞아 떨어질지는 지켜봐야 한다. 국가적 치유가 필요한 시점에 현실과 동떨어진 채 자신이 설정한 적들과의 싸움에만 몰두하는 대통령을 국민들이 얼마나 더 용인할지 의문이다. 미국이 직면한 근본적 위기는 팬데믹이나 경제 붕괴, 혹은 폭력소요가 아니라 분열의 토템으로 볼썽사납게 서있는 대통령의 리더십일지 모른다. 이런 리더십을 걸러내지 못하는 한 미국의 영광을 되찾고 ‘미국을 다시 한 번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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