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이후 가정의 역할과 의미
2020-06-01 (월)
최상석 성공회 워싱턴한인교회 주임신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한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업장이 문을 닫고 기업, 학교, 종교 활동, 국가 등 지구촌 전체가 엄청난 피해를 받고 있다. 우리의 가정도 예외가 아니다.
가정은 모든 사회구성원의 모항(母港)이며, 사회의 기본단위이다. 코로나19로 학교나 기업 심지어 교회나 관공서가 문을 닫을 지라도 가정은 문을 닫지 않는다. 아니 닫을 수 없다. 가정은 문을 닫을 수 없는 곳이다. 가정은 또한 각종 재난과 시대의 풍랑 속에서 서로 사랑하며 가족의 안전과 생명을 지켜가는 사랑과 생명의 공동체요 사회 최후의 보루(堡壘)이다. 가정은 미국인의 사랑받는 노래 ‘즐거운 나의 집’에도 있듯이, 세상에서 힘들고 어렵고 위험할 때 돌아갈 안식처요, 낙심과 절망 중에 다시 힘을 얻어 세상을 살아갈 의미와 용기를 갖게 하는 사랑의 샘터이다. 나라의 번영과 기쁨을 누리는 곳도 가정이다. 가정은 그런 곳이다.
코로나 대유행은 쉴 새 없이 달리던 현재의 지구적 상황과 인류의 생활방식을 멈추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가정도 이 메시지를 외면할 수 없다. 그 동안 우리 인류는 무엇을 위하여 노동하고, 사회와 국가를 이루고, 학문과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며 이렇게 열심히 달려왔는가? 결국 안전하고 깨끗한 세상에서 가족들이 함께 사랑하며 일상의 행복을 누리고 나아가 세상의 모든 가족들과 함께 평화를 이루며 살아가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동안 무분별한 자원개발, 대량생산과 소비, 국가이기주의, 성장주의와 무한경쟁 사회 속에서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우리의 목적과 길을 잃어버렸다. 가정의 가치, 가족의 소중함도 뒷전으로 밀렸다.
그러다보니 사람이 먼저가 아니라 오히려 물질과 기술이 먼저인 세상이 되었다. 본말전도, 객반위주(客反爲主)의 세상이 된 것이다. 인류 본래의 삶의 목적을 회복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 정부나 국제사회는 물론 종교의 영역까지 포함하여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새롭게 찾아내야 할 것이다. 가정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일 역시 뒤로 미룰 일이 아니다.
코로나 재난을 겪으면서 적지 않은 가정들이 바이러스가 아닌 가족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자 오히려 서로 불편해 하며 갈등을 겪는 가정이 늘고 있다. 대화 부족이나 소통의 서투름에서 오는 불만, 가사 분담의 불균형에서 오는 갈등, 눈에 거슬리는 서로의 흠결이나 단점들, 갈등 해결 과정에서 나오는 감정 충돌, 언어폭력이나 가정폭력 등이 발생한다. 심지어 코로나 이혼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우리의 사회는 물론 가정 역시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재택근무로 집에 있는 시간은 늘어날 것이고, 학생들도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받는 일이 많을 것이다. 집안일도 주부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온 가족이 서로 분담하게 될 것이다. 가정은 재택근무가 이루어지는 노동의 현장이요, 학문과 정보를 배우는 작은 학교요, 기도와 신앙생활이 이루어지는 작은 교회나 수행 공간이 될 것이다. 이제 가정은 세상에 일하러 가기 위하여 단순히 먹고 잠자는 공간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일상의 행복을 서로 나누고, 일하고, 운동과 취미와 문화를 즐기고, 온라인을 통하여 정보를 나누고 세상과 접촉하며, 자기를 실현해 가는 세상을 향해 열린 무대이자 창(窓)이며, 가족과 세상을 이어주는 플랫폼(platform)이 될 것이다.
코로나 이후 가정의 역할과 의미는 분명 더욱 확장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를 겪으며 정부가 새로운 사회시스템을 고민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가정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가족 이기주의가 아닌 진정한 가정의 의미와 목적을 새롭게 물어야 한다. 이제는 가정이 곧 세상이다. 가정이 살아야 세상이 산다. 온 종일 함께 있어 서로 불편한 가정이 아니라, 그것이 자연스럽고 행복한 가정이 되어야 한다.
내가 먼저 가족을 이해하고 지지하고 사랑하려는 부단한 노력과 가족을 위한 기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온 가족의 사랑과 행복을 돈독히 해주고, 우리 가족이 세상에서 ‘따뜻함’ ‘바름’ ‘옳음’ ‘열림’을 지키며 살도록 힘을 주는 종교적 가르침이나 그리 거창하지 않아도 지구촌 촌민(村民)으로 진솔하고 담담한 가운데 이웃을 섬기며 더불어 사는 마음을 지켜줄 가정의 영성(靈性)이 요청된다.
<최상석 성공회 워싱턴한인교회 주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