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몇 달간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활동이 제한되어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에 충실히 동참하고 있다. 텃밭 가꾸는 몸 쓰는 일로 시간을 보내며 이것 저것 집안의 소일거리를 찾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아들녀석이 영화와TV 쇼를 즐기라고 넷플릭스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에 덤으로 가입시켜 줬다. 덕분에 액션·스릴러·범죄·로맨스·클래식 영화 뿐만 아니라 한국 드라마 등 모처럼 다양한 시나리오에 마음껏 빠져 판타지 픽션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갑자기 ‘어떤 삶을 살고 싶냐’는 스스로의 질문에 최근에 본 JTBC드라마 ‘이태원 클라쓰’가 문뜩 떠오른다. 매력 넘치는 박새로이와 조이서의 캐릭터만으로도 정말 재미있는 드라마이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박새로이는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아버지가 발령이 나면서 전학을 갔고 전학 간 첫날부터 제대로 꼬여버린 인생이 시작된다.
같은 반 학생인 이호진이 장근원에게 괴롭힘을 당하는데도 나서는 친구가 하나 없고, 심지어 선생님도 모르는 척 한다. 이유는, 이런 저런 기부로 학교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재벌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분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공 박새로이는 상식대로 행동한다. 장근원에게 그만하라고 경고하지만 우유를 머리에 쏟으며 용기가 있으면 나서 보라는 빈정거린 투다. 참지 못한 박새로이는 장근원을 때렸고 이 일로 재벌 회사 ‘장가’에 다니는 박새로이의 아버지와 다소 개념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장가’의 장 회장이 학교에 불려 온다.
박새로이는 전학 간 하루 만에 퇴학을 당한다. 이후 부자(父子)는 퇴직금으로 작은 식당을 차리며 새로운 출발을 하였으나 뺑소니 교통사고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형사는 재벌 아들 장근원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수사하지만 장 회장이 형사를 매수해 진범인 아들을 대신해 다른 사람을 내세우며 진실은 묻혀 버린다. 한편, 첫 사랑 여자 친구의 귀띔으로 범인이 장근원의 차량이라는 것을 알게 된 박새로이는 그를 찾아 폭행을 가하다 살인미수로 체포된다. 자신의 소신대로 무릎 한번 꿇지 않은 대가는 너무도 컸다. 징역 3년을 확정 받고 교도소에 수감된다.
시발점은 짓밟힘이다. 학교폭력을 당하던 친구를 구해주고 퇴학당하고, 아버지는 그 가해자의 차량에 치여 사망하고, 무릎 꿇지 않았다는 이유로 상식 하나 지키려 했을뿐인데 결과는 참혹하다. 그리고 박새로이는 정말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복수를 꿈꾸기 시작한다. 똑똑한 머리도 아니고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타협하지 않고 꼿꼿하게 소신 있게 사는 삶을 선택한다. 있는 거라곤, 그저 무모하고 우직하며 단단함 뿐이다.
소신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소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평소 고민해 보았지만 현실과 마주하면 그저 사치에 불과하다. 비웃는 짓거리를 하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돈이라면 못할 일이 없는 세상이다. 그래서 선과 정의를 외면하고 양심을 접고 돈과 권력에 굴복하며 현실과 적당히 타협한다. 때로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리란 마음으로 살자고 되뇌어 보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당당히 ‘아니오’ 외치고 싶지만 손해나 피해가 따르고 회유와 압력과 협박까지 가해지면 마음 속 구석진 데서는 나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그때 시절 읽었던 한 권의 책이 생각난다. 쿠라다 하쿠조(倉田百三, 1891~1943)가 사랑에 대해서 쓴 짧은 산문집 ‘사랑과 인식의 출발’이다.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감정을 어떻게 인식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 에세이다. 영혼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특히 젊은이를 위한 지침서라 할 정도로 청춘 시절에 생각해야 할 중요한 고민들을 거의 다 적고 있다. 특히, 작가 자신이 겪은 뼈아픈 청춘 시절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는데다 진실된 사랑과 열정, 용기 있는 정신에 대해 가장 본질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어서 나의 청춘을 사로잡았다.
“인생의 슬픔을 알게 되거든…비천함과 더러움이 숨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상념을 위대하게 하고, 꿈을 맑고 깨끗하게 하여라. 사랑을 할 때 인간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순수 해지는 걸세.” 작가의 글을 사색하며 슬쩍 스쳐 지나간 ‘이태원 클라쓰’의 OST 싱글 김필 노래의 ‘그때 그 아인’ 애절한 감정을 느껴 본다. 그리고 나의 삶에 내가 있는가를 묻게 된다. 그렇게 씁쓸한 세상에 맞춰가는 삶이 정말 원하는 삶일까? 삶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삶의 껍질을 살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소신은 분명한 원칙과 논리에 바탕을 둔 것이지만, 소신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는 결국 박새로이처럼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교양을 갖추는 것이다. 일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사법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머리에 암기 지식을 쑤셔 넣는 일은 교양이 아니다. 증거가 없는데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참고인을 협박하여 허위 증언을 교사(敎唆), 피고소인을 기소하는 썩은 검사들의 나쁜 짓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동물이야 못된 꾀 같은 걸 부릴 줄 모르니 인간처럼 야비한 짓은 안한다. 한 평생에 걸쳐 쌓아 온 명예에 누명을 덧씌워 모욕을 주고, 빼앗고, 짓밟는 한명숙·안경환·조국·정경심 공소 사건 그런 짓 말이다. ‘이태원 클라쓰’의 박새로이가 위대해 보이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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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국 / 정치 철학자, VA>